지난 15일 아세안 10국과 한·중·일, 호주·뉴질랜드 등 15국이 RCEP(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에 서명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 특히 현대차가 수혜를 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동남아 주요 국가가 한국 승용차와 화물차, 주요 자동차 부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기로 하면서 ‘일본 텃밭’인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려는 현대차에 활로를 열어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번 RCEP에서 중국이 대다수 수입차에 부과 중인 관세 25%를 일본차에만 15%로 감축해주기로 하면서, 중국 시장에서는 일본차 입지가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승용·트럭·부품 관세 철폐… 338만대 동남아 시장 열리나
한국은 RCEP 참여 15국 중 일본을 제외한 14국과 이미 FTA(자유무역협정)가 체결돼 있어 RCEP을 통해 추가로 관세 면제 혜택을 보는 품목이 많지는 않다. 다만 아세안 국가들이 한국 자동차 관련 품목 관세를 이번에 대폭 철폐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는 차종별로 10~35%인 승용차 관세를 철폐한다. 또 필리핀은 최고 30%인 승용차 관세를 없애기로 했고,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도 면세에 동참한다.
한국산 트럭(화물차) 관세를 철폐하는 아세안 국가도 많다. 태국은 40%에 달하는 트럭 관세를 없애기로 했고, 필리핀도 최고 30%인 트럭 관세를 면제한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동남아에 트럭을 수출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인도네시아에 있는 반(半)조립 공장에서 소량만 생산(올 1~9월 3700대 판매)한다. 트럭에 대한 고율 관세가 철폐되면,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국내 상용차 공장도 활력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필리핀·태국은 안전벨트·에어백·휠 등 자동차 부품에 부과하는 최고 40% 관세를 없앤다. 인도네시아는 현대차가 ‘동남아 시장의 교두보’로 삼고 완성차 공장(2021년 말 완공·연산 능력 25만대)을 짓고 있는, 동남아 최대 자동차 시장이다. 현대차 투자를 적극 유치했던 인도네시아가 현대차의 한국산 부품 조달이 수월하도록 지원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동남아 시장은 일본 자동차의 ‘제2 내수 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차 업체들의 점유율이 높다. 전체 승용차 시장(지난해 338만대)의 60%를 점유하고 있고 일부 국가에선 80~90%가 일본차다. 트럭 시장도 도요타·이스즈·미쓰비시후소·UD트럭 등 일본 판이다. 이에 비해 현대·기아차의 동남아 점유율은 4.5%(올 1~9월)에 불과하다. 이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판을 흔들겠다”며 2017년 동남아 TF를 꾸려 진출을 모색해 왔다. 올해 상반기 베트남 시장에서 ‘한류’를 타고 현대차가 도요타를 제치고 처음 1위에 오르는 등 성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일본차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중국, 일본 중대형 차종 관세 25%→15% 감축 특혜
한편 이번 RCEP 협정으로 중국에선 일본이 혜택을 볼 전망이다. 중국이 대다수 수입차에 매기는 25% 관세를 일본 중대형 승용차(배기량 2500~4000cc)에 대해선 협정 발효 즉시 15%로 감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중대형급 시장을 일본에 활짝 열어준 것이다. 가뜩이나 중국에서 판매량이 바닥을 치고 있는 현대차 입지는 더 좁아지게 됐고, 날이 갈수록 중국에서 인기가 올라가는 일본차는 날개를 단 격이 됐다. 올 1~9월 도요타(110만대·3위), 혼다(109만대·4위), 닛산(82만대·6위)의 중국 합작 법인 판매량은 302만대로 전체 시장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현대·기아차는 46만대로 점유율 3.7%에 그쳤다.
중국에 진출한 다수 완성차 업체는 고율 관세 때문에 대부분 현지 생산을 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대량생산하기 어려운 고급 차종 등 소량 생산 차종을 수출할 수 있게 되면 소비자 선택 폭이 넓어지고 판매 확대로 이어진다. 현대차도 현재 극심한 판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베이징현대 브랜드가 아닌 ‘현대차’ 브랜드인 팰리세이드와 ‘제네시스’ G80·GV80을 내년 중국에 수출해 ‘고급 차’ 이미지를 구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렉서스 같은 일본차가 관세 혜택을 받아 중국 시장에 진입하면 가격 경쟁에서 밀려 위기 극복이 힘들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이번 RCEP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과 ‘통 큰 거래’를 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기술 탈취국’ ‘비(非)시장경제국’으로 몰아붙이며 무역 전쟁을 벌여 고립 위기에 처한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 FTA’라고 하는 RCEP을 통해 자유무역을 주도하고 있다고 내외에 홍보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미국 눈치를 보는 일본이 중국 주도의 RCEP에 최종 서명할 수 있도록 파격 조건을 수용했다는 해석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RCEP으로 동남아 수출에 숨통이 트이긴 하겠지만 일본이 동남아 현지 생산을 통해 장악한 시장을 단숨에 빼앗아오기는 힘들 것”이라며 “반면 일본차의 중국 판매 확장에는 더 속도가 붙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