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현대차가 진행한 차세대 전기차 세 차종의 배터리 입찰전에서 중국 배터리 업체 CATL이 두 차종을 수주한 것으로 알려지자 한국 배터리 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중국 CATL은 2017년부터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저가 입찰의 승리일 뿐 기술력은 아직 한국에 밀린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배터리 업계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저가 공세로 시작해 기술력까지 글로벌 1위 수준으로 끌어올린 중국의 대표적인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를 연상시킨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현대차 시선을 끈 ‘셀투팩’ 기술
CATL은 배터리 엔지니어 출신 쩡위췬 회장이 2011년 배터리 회사 ATL에서 전기차용 배터리 사업을 따로 떼어 독립한 회사다. 쩡위췬 회장은 일본 전자부품 기업 TDK의 홍콩 자회사 SAE에서 일하다, 1999년 SAE 내 중국 엔지니어들과 ATL을 창업했다. ATL은 2005년 일본 TDK 자회사로 편입됐다. 결국 일본 회사에서 습득한 배터리 기술이 창업의 밑천이 된 셈이다.
몇년 전만 해도 CATL의 기술력은 업계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해마다 매출의 7~8%를 연구⋅개발에 쏟아붓고, 중국 정부가 ‘전기차 배터리 보조금'을 중국 업체에 밀어주면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최근엔 국내 업계도 시도하지 못한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중 하나가 ‘셀투팩 기술'이다. 현대차도 이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기차 배터리는 셀이 모인 모듈, 모듈이 모인 팩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전기차에는 100여 개의 셀이 들어가는데, 10여 개의 셀을 하나의 모듈로 묶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러 개의 모듈을 하나의 팩으로 조립한 뒤 전기차에 넣는다. ‘셀투팩’(cell to pack) 방식은 셀에서 바로 팩으로 이어지는 설계 기술이다. 이렇게 모듈을 없애면 공간을 더 확보해 에너지 밀도는 높아지고, 부품 수도 줄어들어 비용 절감 효과도 커진다.
업계에 따르면, 셀투팩 방식으로 배터리 제조 시 사용되는 부품 수는 40% 줄고, 공간 활용률은 15~20% 향상된다. 만드는 방식도 간단해져 시간당 생산량도 대폭 오른다. 모듈 과정이 생략된 만큼 팩 강도를 강하게 해야 하고,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등을 무선으로 연결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CATL은 미국 테슬라 모델3, 폴크스바겐 ID.3 등의 모델에 이 같은 셀투팩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다. 한 자동차 업계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는 전기차 가격의 40%를 차지하는 배터리 비용을 낮추고 싶어 한다”며 “CATL을 선정한 배경에는 셀투팩 기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이니켈' 기술로 ’811 배터리' 양산
배터리의 양극재는 니켈·코발트·망간 등을 섞어 만든다. 니켈의 함량을 높이면, 배터리의 에너지 용량이 높아져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늘어나지만 반대로 폭발 위험성도 커진다. 니켈 함량을 높이면서, 안전성을 담보하는 것이 배터리 업체의 기술력이다. CATL은 대형 배터리의 니켈 함량을 80%까지 높인 ’811 배터리' 양산을 업계 처음 성공했다. 90%까지 높인 배터리도 준비 중이다. 한국 업체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앞선 수준이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대 교수는 “전기차 배터리는 1~2%포인트의 함량 차이로도 주행거리가 10% 이상 차이 날 수 있다”며 “안전성 문제는 따져봐야겠지만, 일단 하이니켈 배터리 경쟁력은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낮은 가격에 맞춤형 공급
업계에선 CATL 제품 가격이 한국 배터리 업체 대비 10~20% 저렴하다고 보고 있다. CATL은 원료 채굴용 광산, 양극재 물질 제조 등에서 자회사를 통한 수직 계열화를 달성, 원가 경쟁력을 높였다. 업계 관계자는 “해마다 수천억원 이익을 내고 있어 막대한 증설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CATL의 또 다른 경쟁력은 다양한 제품군이다. CATL은 국내 업체들이 주력하는 고급형 NCM 배터리뿐 아니라 보급형인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양산이 가능하다.
또 CATL은 각형과 파우치형 배터리를 모두 만든다. 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 등 배터리 소재를 알루미늄 사각캔에 담으면 ‘각형’, 필름으로 된 팩에 담으면 ‘파우치형’이다. 부피나 출력, 성형 가능성 등에서 각각 장단점이 있다. 서로 제조 공법이 다르기 때문에 교차 생산이 안 된다. 보통 업체들은 전략적으로 하나의 형태를 택해, 집중하는 방식을 쓴다. 전자 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수 있다는 건 의사결정 체계가 빠르다는 것”이라며 “과거 삼성전자 반도체도 이런 스피디한 납품을 앞세워 인텔을 제치고 애플의 주문을 따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