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모(구글의 자율주행 자회사), GM크루즈(GM의 자율주행 자회사) 같은 미국 대기업만 자율주행 경쟁 선두에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죽스(Zoox)·뉴로, 중국의 포니AI·오토X 같은 스타트업도 IT·자동차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대학·기업 연구자 몇 명으로 시작했지만, 기술의 가치를 알아본 장기 투자자들 덕분에 창업 몇 년 만에 대기업에 견줄 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자본시장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미국·중국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에도 자율주행 스타트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 자체 기술력으로 실적을 내는 업체가 몇 년 새 10여 곳으로 늘었다. 물론 ‘피처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뀔 때 애플과 구글 안드로이드 진영의 몇몇 업체가 시장을 장악했듯, 자율주행도 몇몇 대기업이 장악할 텐데 한국 스타트업이 이들을 이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개발자들은 “한국이 원천 기술·서비스로 승부할 여지는 이전보다 오히려 많다”고 주장한다. 테슬라·구글은 완전자율주행 시대가 곧 올 것처럼 말하지만, 인간 개입이 필요 없는 완전자율주행이라는 ‘골대’엔 지구상 어떤 기업도 아직 근처조차 못 갔다는 것. 또 나라마다 교통법규·신호체계·도로환경이 제각각이라 맞춤형 개발이 필요하고, 일반도로의 개인 차량보다는 특정 지역에서 셔틀처럼 운행되는 공용차량이나 물류·산업현장에 먼저 보급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많은 수요처에 대응하기엔 스타트업이 대기업보다 유리하다는 얘기다.
지난 16일 오전 경기도 평촌에 위치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오토노머스에이투지(Autonomous a2z)’를 찾았다. 70평(230㎡) 남짓한 공간에 20여 명이 컴퓨터 화면 보며 작업 중이었다. 에이투지는 작년 말부터 세종시에서 카카오모빌리티와 국내 첫 유상 자율주행 서비스도 시작했다.
에이투지는 현대자동차의 자율주행 인력 4명이 나와 2018년 창업했다. 현대차의 2016~2017년 미국 CES 자율주행 프로젝트, 2018년 평창올림픽 자율주행 프로젝트 등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4명이 자본금 3000만원을 모아 월급도 안 가져가고 시작, 창업 2년 만에 직원 50명 회사로 키웠다.
한지형 에이투지 대표는 ‘미국·중국의 기술 경쟁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구글·GM이 조 단위 돈을 쏟아붓고도 자율주행차 양산을 못했다는 건 아직 이 기술이 현재진행형이며 변수도 많다는 뜻”이라며 “해외 개발자들과 교류하면서 한국도 기술력에선 미·중에 밀리지 않는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기술에 자신 있더라도 투자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선 당장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에이투지의 전략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정부과제·기술용역을 따내 초기 투자 없이 회사를 생존·성장시키는 것이었다. 한 대표는 “창업 첫해부터 2억, 2019년 10억원 매출을 냈다”면서 “어떻게든 생존해 사업 기회를 키워나간다면, 국내 자율주행 스타트업 중에서도 쿠팡이나 미국·중국 사례처럼 조 단위 기업가치 기업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했다.
이어 에이투지의 자율주행차를 한 대표와 타봤다. 제네시스 G80에 자체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을 얹은 것이었는데, 차량이 스스로 교통신호와 거리 상황을 파악한 뒤 차선을 바꾸고 가고 서고 도는 것이 무척 매끄러웠다. 20분 주행 중 사람이 스티어링휠을 잡은 경우는 딱 한 번이었다. 도로 밖으로 앞쪽이 크게 튀어나온 채로 세차 중인 차량 때문이었다. 세차 중인지, 차량 합류를 위해 잠시 멈춘 것인지의 판단을 시스템이 잠시 머뭇거린 것이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문래동의 ‘토르(Thor)드라이브’를 찾았다. 실리콘밸리의 IT 벤처기업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계동경 대표에게 “분위기가 참 젊다”고 하자 그는 “1988년생인 나는 우리 회사에서 원로”라며 웃었다. 토르는 계 대표 등 서울대 자율주행팀 출신 6명이 2015년 창업했다. 미국에도 개발 거점을 갖고 있는데, 2019년 캘리포니아 당국이 발표한 업체별 자율주행시험 거리 랭킹에서 16위를 차지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 업체 중 가장 높았으며, 돌발상황 시 인간 운전자의 개입 빈도 즉 자율주행 신뢰·안전도에서 도요타·닛산보다도 뛰어난 성적을 냈다. 작년에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공항의 자율주행 사업을 따내, 지금은 미국 개발 거점을 오하이오주로 옮겼다. 계 대표는 “대학 시절 공동 창업 멤버들이 스탠퍼드대를 방문해 연구교류도 했는데, 그때 만났던 사람 중 한 명이 죽스를 창업했다”면서 “우리 개발자들도 그들 실력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에이투지나 토르가 인지·판단·제어의 자율주행 핵심 3개 영역을 모두 다루는 반면, ‘스트라드비젼’은 딥러닝 기반의 컴퓨터 화상인식 기술에 특화한 기업이다. 코넬대 영상처리 박사 출신 김준환 대표가 이끌고 있다. 포항공대 출신들이 2014년 공동 창업해 직원 140명 기업으로 성장했다. 개발자만 110명이며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나온다. 현재까지 전 세계 누적 1300만대 차량에 자사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미국·유럽·일본에서 특허 189개를 취득했고 700여 개를 출원 중이다. 자율주행·AI 선도기업인 미국 엔비디아의 개발 파트너사다.
자율주행 알고리즘을 실제 차량의 움직임으로 연결하는 제어 전문의 ‘컨트롤웍스’도 있다. 2009년 설립됐으며, 현대차를 거쳐 국내 자동차 부품 대기업 만도에서 자율주행팀을 총괄했던 박승범 대표가 이끈다. 최근 LG유플러스와 공동으로 자율 주차 시연을 하며 주목받았다.
4개 기업 대표들은 다만 게임업계 연봉 인상 등으로 자율주행 스타트업계 구인난이 심화되는 것을 걱정했다. 스트라드비젼 김 대표는 “자율주행의 미래는 무궁무진하며, 앞으로 더 많은 고급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면서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비전과 우리 자율주행 스타트업들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많이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치고 나가는 中 기업, 대규모 자금 앞세워 자율주행 신뢰도 3위]
미·중 자율주행기술 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중국 자율주행 스타트업들의 성장세가 무섭다.
자율주행기술 개발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주가 발표한 ‘업체별 일반도로 자율주행 시험거리(2020년)’에 따르면, 중국 검색 기업 바이두의 개발자 출신들이 설립한 ‘포니AI’가 36만2900㎞로, 2019년에 이어 3위였다. MIT·프린스턴대 중국인 연구자들이 설립한 ‘오토X’도 작년 8위에서 6위로 뛰어올랐다. 포니AI·오토X는 모두 2016년 설립됐는데, 한국 스타트업과 초기 기술력은 비슷했다는 평가다. 다만 중국 쪽은 초기부터 자국 대기업이나 미·중 벤처캐피털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사세를 키웠다는 게 큰 차이다. 포니AI는 2018년 미·중 벤처캐피털에서 1억1200만달러를 받았고, 오토X는 2019년 알리바바의 투자로 개발력이 급증했다.
운전석에 앉은 감시요원이 사고 등을 피하기 위해 개입한 횟수는 오토X가 3만2777㎞당 한 번꼴로, 전체에서 셋째로 적었다. 기업마다 주행 조건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는 오토X의 자율주행 신뢰·안전도가 캘리포니아에서 시험한 모든 업체 중 3위라는 의미다. 포니AI도 1만7281㎞당 한 번꼴로, 업계 4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