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주요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자율주행차로 질주하는 가운데, 한동안 잠잠했던 일본 도요타도 이 흐름에 동참하며 굵직한 발표를 쏟아내고 있다. 도요타는 지난 19일 중국 상하이모터쇼에서 브랜드 첫 전기차 bz4X를 공개했고, 27일엔 미국 차량 공유 업체 리프트의 자율주행 사업 부문을 5억5000만달러(약 6100억원)에 전격 인수했다. 이어 29일엔 미국 인디애나주 공장에 8억300만달러(약 8900억원)를 투자해 기존 생산 설비를 전기차 SUV 생산 설비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지난 20여년간 하이브리드차만 고집하며 미래차 전환에 한발 늦었다는 평가를 받던 도요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1위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의 진격을 두고, 자동차 업계에서는 “미래차 시대 본격 개화를 앞두고 거인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기차·자율주행차·차량 공유까지...안 뛰어드는 영역이 없다

이번에 도요타가 인수한 리프트의 자율주행 부문은 지난 수년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자율주행 로보택시를 시범 운영하며 10만건 이상의 운영 데이터와 노하우를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자율주행 업계 관계자는 “리프트의 자율주행 원천 기술력은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운영 경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며 “도요타의 자율주행 상용화 시점을 앞당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요타는 이번 인수를 통해 인재도 다수 확보했다. 리프트의 연구·개발 인력 300명의 고용을 승계하면서 자율주행 알고리즘 개발 인력이 1500명을 넘어섰다. 도요타는 내년 신입 공채 때도 기술직 절반을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채용할 계획이다.

자동차 업계에선 미래차 영역을 ‘CASE’로 부른다. 커넥티드카(Connected), 자율주행차(Autonomous), 차량 공유(Sharing), 전동화 차량(Electrified)의 앞글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전기차 출시와 공장 생산 설비 교체가 E의 영역이라면, 리프트 사업 부문 인수는 A에 해당한다. 도요타는 C·S 분야에서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7일엔 다이하쓰·스즈키·스바루·마쓰다 등 일본 자동차 회사들과 커넥티드카에 필요한 통신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커넥티드카는 인터넷에 상시 연결된 차량을 뜻한다. 통신기 표준을 도요타가 만들면 나머지 4개 회사가 동일한 제품을 탑재하는 형태다. 개발 비용을 최소화하고 시스템 운영도 편리해진다.

도요타는 앞서 2월엔 미국 자율주행 스타트업 오로라와 차량 공유 영역인 로보택시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3월엔 후지산 인근에 자율주행·사물인터넷 등을 기반으로 한 미래형 신도시 ‘우븐시티’도 착공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도요타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전기차가 본격화되는 것을 보고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며 “3~4년에 걸쳐 준비해왔던 미래 전략을 올해 들어 하나씩 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압도적 자금력 앞세워 공격적 투자 이어가

도요타가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 투자를 퍼붓는 건 업계 트렌드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CASE 중 어떤 영역이 가장 돈이 될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전방위적 투자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디젤에 올인하다가 연비 조작에 휘말렸던 폴크스바겐·다임러 등 유럽 자동차 업계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겼다.

이런 전략이 가능한 것은 압도적인 도요타의 자금력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도요타는 작년 말 기준 현금성 자산 보유액이 약 46조원으로 현대차·기아(약 20조원)보다 배 이상 많다. 연간 영업이익도 약 25조원으로 자동차 업계 통틀어 가장 돈을 많이 번다. 지난해 도요타는 연구·개발(R&D) 투자에 12조원을 썼다. 알파벳(구글 모회사)·마이크로소프트·삼성전자 등에 이어 세계 12위였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선택과 집중' 전략은 효율적이지만 막상 선택이 잘못됐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도요타는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미래차 시장에 실패 없이 안착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도 도요타와 비슷한 전략을 추구한다. 자율주행 기술 업체 모셔널을 합작 설립하는 데 2조3000억원을 투자하고,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을 개발해 아이오닉5를 출시했다. 로봇 업체인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했고,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도 직접 나섰다. 김필수(대림대 교수) 전기차협회장은 “도요타가 전고체 배터리 등에서 선도적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양산 단계엔 아직 못 미쳤다”며 “미래차 주도권 경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