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카메라 부품을 만드는 국내 한 자동차 부품사의 구매 담당 임원은 지난달 싱가포르로 긴급 출장을 다녀왔다. 현지 차량용 반도체 현물 시장에서 어떻게든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 임원은 정상가보다 30% 웃돈을 내고 얼마 남지 않는 반도체 물량을 겨우 확보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반도체 물량만 있다면 정가의 10배라도 사고 싶은데 사방에서 ‘물건 없다’는 소리만 들려온다”며 “반도체 물량 확보를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싱가포르 차량용 반도체 현물 시장엔 ‘반도체 급행료’도 생겨났다. 주문 가격의 10~20% 웃돈을 내면 브로커가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로부터 물건을 먼저 받아다 주는 것이다. 해외의 온라인 반도체 부품 몰에선 개당 1000원 하던 반도체 칩 가격이 최근 3만~5만원 선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한 부품사 관계자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는 가격이지만 납품 시일을 맞추려면 이 가격에라도 사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 장기화로 자동차 부품업계의 경영난이 심화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은 일부 생산 차질이 발생해도 버틸 수 있지만, 규모가 작은 부품사들은 부품 조달 원가가 폭등하면서 유동성 부족에 내몰리고 있다. 작년 코로나 사태에 이어 올해 반도체 부족 사태까지 겹치면서 자동차 부품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반도체 원가 부담에 대출로 겨우 막아

자동차 센서 모듈을 만드는 한 자동차 부품사는 최근 원가 부담이 40% 늘었다. 장기 계약에 묶여 있는 완성차 납품 단가는 요지부동인데 센서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부품사와 완성차 회사는 장기 계약을 맺고 부품을 납품하는데 물량 공급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부족한 현금을 대출로 겨우 막아내고 있다.

반도체 품귀는 반도체 부품을 만드는 부품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 브레이크 부품을 만드는 한 부품사 사장은 “요즘 자동차 부품사 공장 가동률은 대부분 50%를 밑돌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때문에 완성차 공장이 멈추면, 다른 부품도 모두 납품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반도체 부품사의 공장이 돌아간다고 하면, 그때 우리도 공장 가동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반도체를 취급하지 않는 회사의 실적도 반도체에 걸린 셈이다.

전장부품 제어기를 만드는 한 부품사 관계자는 “NXP, 르네사스, 인피니언 같은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에 1년치 물량을 주문했는데도 물량 확정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부품사 관계자는 “납품 대금은 외상 거래로 6개월이나 1년 후에 받을 수 있는데, 반도체는 현금 주고 사와야 한다”며 “대출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곧 유동성이 바닥날 것”이라고 말했다.

◇부품사 10곳 중 8곳, “반도체 사태로 경영난”

한국자동차산업연합회가 최근 국내 자동차 부품사 78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4.6%(66곳)가 ‘반도체 품귀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품사 60% 이상이 최소 10% 이상 부품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그중 일부는 납품 실적이 올해 들어 30% 이상 급감했다.

한 부품사 관계자는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최소 2~3년은 지나야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며 “반도체 공급난이 올해 내내 이어진다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동차산업연합회 정만기 회장은 “5~6월 중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정점에 다다르면 부품 업체 상당수가 위기에 몰린다”며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특별 금융지원 프로그램, 고용안정기금 확대 등의 정부 지원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