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경기도 일산의 한 전기차 폐(廢)배터리 보관 창고. 8m 높이의 거치대에 폐배터리 320여개가 비닐에 싸인 채 쌓여 있었다. 이곳에는 폐차된 전기차에서 나온 폐배터리가 매달 10~20개씩 들어온다. 중국과 유럽에선 전기차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전기차 배터리들이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쌓여 있다. 스마트폰용 배터리는 분해해 재활용하지만 전기차 폐배터리는 아직 안전성 평가 기준 같은 법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은 탓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확산에 따라 세계적으로 폐배터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재활용 시장도 급성장할 것”이라며 “정부가 산업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전기차 배터리 강국 한국이 폐배터리 산업에선 뒤처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1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한 전기차 폐배터리 보관 창고에 비닐에 싸인 폐배터리들이 천장 높이까지 쌓여있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한 전기차 폐배터리는 이 창고에만 320여개가 보관중이지만, 아직까지 재활용을 뒷받침하는 관련 법 규정이 마련되지 않아 먼지만 쌓이고 있다. /장련성 기자

◇방치되는 폐배터리

국내 전기차 폐배터리 창고는 일산과 제주테크노파크, 경북 테크노파크 3곳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용하거나 환경부가 민간 업체에 위탁해 운용한다. 전기차 폐배터리는 정부에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새 전기차를 살 때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을 받기 때문이다. 폐차장들은 폐차 과정에서 나온 배터리를 지자체를 통해 창고로 보낸다. 올해 4월 말까지 창고 3곳에 쌓여 있는 전기차 폐배터리는 582개. 하지만 전기차 보급이 확산되면서 배출되는 폐배터리 숫자는 2023년 5914개, 2026년 4만2092개, 2030년 10만7520개로 급격히 늘어나 2030년엔 누적 42만2975개에 이를 전망이다. 정부도 폐배터리 급증에 맞춰 올해 하반기에 전국에 4곳의 창고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전기차에는 사무용 책상만 한 면적의 배터리 팩이 들어간다. 배터리 수명은 10년 정도로 15만~20만㎞를 주행하면 용량이 70% 아래로 떨어져 주행거리가 줄고 충전 속도도 떨어져 차량용으로는 수명을 다한다. 하지만 ESS(에너지 저장 장치)나 캠핑용 파워뱅크(휴대용 배터리), 전기자전거나 전기오토바이, 가로등 배터리 등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성능이 더 떨어지거나 외부 충격으로 파손된 경우엔 분해해 수입에 의존하는 리튬, 니켈, 망간, 구리, 코발트 등 희귀 금속을 추출할 수 있다.

이런 재활용 사업을 하려면 재활용에 관한 법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전기차 배터리는 소형 배터리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데다 위험 물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며 “수백 개의 리튬이온 셀로 구성돼 있고, 높은 전압 때문에 감전이나 화재·폭발 가능성이 커서 소형 배터리와는 차원이 다른 재활용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도 2019년부터 사용 후 배터리 성능 평가 방법과 안전 기준 마련을 위해 연구 중이다. 이와 맞물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현대차와 LG화학, 영화테크 등 5개 기업에 규제샌드박스(한시적 규제 유예 또는 면제)를 적용해 사용 후 배터리로 ESS나 캠핑용 배터리를 만드는 사업의 타당성을 실증하고 있다. 문제는 속도다. 배터리 업계에선 “폐배터리 평가 방법과 안전 기준 마련은 이들 기업의 실증 특례가 끝나는 빨라야 2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은 폐배터리 시장 선점 경쟁

반면 전기차 강국들은 폐배터리 시장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 세계 1000만대의 전기차 중 450만대를 보유한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 중국은 2018년 7월부터 베이징·상하이를 포함한 17개 지역에서 폐배터리 재활용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지방마다 배터리 재활용센터를 세우고 배터리 제조사, 중고차 판매상, 폐기물 회사와 공동으로 폐배터리 회수·재판매가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저장·장시·후베이·후난·광둥성에는 각각 전기차 폐배터리 회수·재활용 기업 리스트를 발표하고, 회수와 재활용 시스템도 만들고 있다. 독일의 경우는 폴크스바겐이 북부 니더작센주에 있는 잘츠기터에 연간 3600개의 폐배터리를 재활용할 수 있는 재활용 공장을 열었다. BMW는 보쉬, 스웨덴 발전사와 공동으로 ESS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국내 전력망과 연계하는 시범 사업을 하고 있다. 일본 닛산은 이미 2016년부터 전력 기업과 협력해 폐배터리로 가정용 ESS를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