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고위 관료·정치인들이 한국에 오면 꼭 들르는 곳이 생겼다. 바로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같은 배터리 기업이다. 지난달 미 국무부에서 공급망 재편을 담당하는 호세 페르난데스 차관은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 만나는 일정을 최소화하고, 한국 배터리 3사 본사를 모두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달 전 방한한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주요 기업과의 면담에 배터리사 임원들을 불렀다. 비슷한 시기 존 오소프 조지아주 상원 의원은 한국을 찾아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면담했다.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미국은 이제 배터리를 반도체만큼 중요한 미래 산업의 핵심 축으로 보고 있고,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여기기 시작했다”며 “한미 배터리 협력 관계를 ‘공급망 동맹’과 ‘경제 안보 동맹’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오창 배터리 공장 전경./조선일보DB

◇합작 투자 27조원, 전기차 400만대 생산 가능

미국 완성차 ‘빅3′(GM·포드·스텔란티스)와 한국 배터리 3사의 합작 투자 금액은 총 27조원, 한국 배터리업체의 독자 투자 금액까지 합치면 30조원으로 추산된다. 생산 규모는 연 330GWh(기가와트시) 규모로 전기차 400만대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작년 1490만대 규모의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 비율은 3%(43만대) 수준인데,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선두는 GM-LG 동맹으로 총 4개 공장의 생산 규모가 약 140GWh에 달할 전망이다. 포드와 SK는 129GWh, 스텔란티스는 LG·삼성과 각 1개씩 63GWh 규모로 짓는다. 빅3뿐 아니라, 현대차·혼다 같은 업체들도 미국 배터리 공장을 짓기 위해 한국 배터리사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고속 성장할 미 전기차 산업이 한국 배터리에 의존하게 된다. 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은 최소 180만명의 직간접 일자리를 창출하는 핵심 제조업으로 미 GDP의 3%를 차지한다. 바이든 정부는 이 자동차 산업을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있던 한국 배터리 소재 업체들이 사업을 확대할 기회도 열렸다. 실제 포스코케미칼과 에코프로비엠은 양극재, 엔캠은 전해액 생산을 위한 공장을 미국에 짓기로 했다.

◇공급망 동맹까지 확대해야

배터리는 과거 전 세계 안보 기조를 흔들었던 석유를 대체하는 강력한 존재로, 한·중·일 업체가 주도하고 있다. 특히 배터리는 부피가 크고 무거운 데다, 전기차 제조 비용의 30%를 차지해 미 완성차 업체들은 현지 합작 생산을 통해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중국과 패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배터리 파트너로 택하고 있다. 일본 배터리 강자 파나소닉이 테슬라 외의 협업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한국 업체들이 공격 투자에 나서면서 특별한 기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제는 한국 배터리 업계가 핵심 소재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배터리 양대 소재인 ‘양극재’를 만드는 중간재인 전구체(니켈·코발트·망간을 섞은 가루), 음극재를 만드는 흑연을 대부분 중국에서 조달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 배터리 공장에서도 중국에서 소재를 수입해 쓸 수밖에 없다”며 “당장은 미국도 어쩔 수 없다고 보겠지만, 공급망 다변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제 바이든 정부는 지난해 삼성전자 등 미국에 진출한 주요 반도체 업체에 영업 비밀까지 담긴 공급망 정보를 요구했다.

LG 배터리 탑재된 GM 전기 픽업트럭… 바이든도 “굿”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GM 디트로이트 공장을 찾아 전기 픽업트럭인‘허머EV’를 시승하고 있는 모습. 이 차에는 LG에너지솔루션이 GM과 만든 대용량 배터리가 탑재돼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말 GM과 포드 공장을 모두 방문했고, 전기차 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이 1등 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미국과 ‘공급망 동맹’으로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미 완성차 업체들과 미국이나 호주·동남아 등 중국 이외 지역에서 코발트·리튬·니켈·흑연 등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 우리도 배터리 소재 조달처를 다양화하고 중국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한미 배터리 협력 강화로 새로운 공급망 구축 기회가 열렸다”며 “하지만 당위성만으로 쉽게 되는 일은 아닌 만큼, 미 업체들과 장기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