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사는 손모(40)씨는 이달 초 2021년식 기아 스포티지 중고 차량을 3400만원에 구매했다. 300만원 가량의 옵션이 장착돼긴 했지만 3000㎞를 뛴 중고차인데 신차보다 500만원가량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손씨가 중고차를 구매한 건 새 차를 사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씨는 “당장 차가 필요한데 새 차를 사려면 6~10개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로 신차 출고가 지연되면서 중고차 가격이 치솟고 있다. 인기 차종의 경우 출고까지 1년가량 걸릴 만큼 공급난이 심화되면서 소비자들이 중고차로 몰리는 것이다. 심지어 중고차 값이 신차 값을 추월하는 사례도 잇따르면서, 프리미엄(웃돈)을 붙여 되파는 것을 기대하고 신차를 사는 ‘리셀’ 수요 조짐도 보인다.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같은 수퍼카로 불리는 차량에서만 이뤄졌던 거래 행태가 일반 차량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 캐스퍼도 P거래, 신차보다 비싼 중고차들
중고차는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하락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가격 추세는 거꾸로다. 중고차 플랫폼 케이카에 따르면 2월 테슬라 모델Y의 중고차 평균 시세는 7867만원으로 지난달 6033만원보다 30.4% 올랐다. 기아 더뉴 봉고3 EV도 2450만원으로 1월(2100만원)보다 16.7% 올랐고, 포터2일렉트릭도 전달 2300만원에서 2650만원으로 상승했다. 현대 아이오닉, 기아 쏘울 EV, 테슬라 모델 3 등도 2~5%가량 가격이 올랐다.
최근엔 새 차보다 가격이 높은 중고차 매물들도 등장하고 있다. 최근 중고차 카페와 거래 사이트엔 현대 캐스퍼가 2150~2250만원에 올라왔다. 이 차의 최상위 모델 가격은 2057만원이다. 신차 가격이 4696만원인 아이오닉5 출고 중고차(2021년식)는 5780만원, 2923만원인 스포티지는 3600만원대 매물이 올라오고 있다. 한 중고차 매매상은 “차량 대기 기간 탓에 웃돈이라도 주고 차를 사겠다는 수요가 생기고 있다”며 “차를 샀다가 임시번호판 단계에서 바로 팔아 차익을 챙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중고차를 매입하는 딜러 간 입찰 경쟁도 과열되고 있다. 과거엔 인기 차종에도 5~10명가량 딜러들이 입찰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중고차 플랫폼별 최대 정원인 20~30명이 꽉 찬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원에서 딜러로 근무하는 권민혁(32)씨는 “딜러 입찰부터 과열 경쟁이 이뤄지면서 자연히 중고차 값도 계속 오르는 구조”라고 말했다.
◇반도체 공급 부족에 웃는 렌터카 리스 업체
소비자들 입장에선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다. 최근 수입차들을 중심으로 10% 이상 제공되던 신차 할인 등이 자취를 감췄는데 웃돈 거래는 예산이 뻔한 소비자들의 부담만 키운다는 것이다. 자동차 커뮤니티 등에선 “중고차 가격 상승이 다시 신차 가격을 밀어 올릴 여지도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뜻밖의 호황을 누리는 건 렌터카와 리스 업체들이다. 장기 렌트나 리스의 경우 업체가 차량을 이미 확보한 경우가 많아 신차 출고 시 대기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덕분에 새 차를 찾는 수요가 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렌터카사업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렌터카 등록 대수는 24만8193대로 전년(23만8092대)보다 4.2% 증가했다.
이는 이들의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롯데렌털은 지난해 매출 2조4227억원,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53% 늘어난 2453억원을 기록했다. SK렌터카도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넘었다. SK렌터카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색상이나 옵션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출고까지 기간이 짧으면 구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고객 증가로 인기 모델은 장기 렌트도 몇 달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태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반도체 수급난은 단기간에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중고차 값 강세는 올해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