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탈원전과 탄소 중립을 추진해왔던 독일이 에너지 안보 위기에 봉착하자 석탄 발전을 늘리는 한편, 원전 가동 연장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의 롤모델로 삼았던 독일 스스로 급격한 탈탄소 정책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이다.
독일 정부는 19일(현지 시각) 멈춰 있던 석탄 화력발전소를 재가동하는 내용의 긴급 법안을 승인했다. 지난 15일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이 독일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을 통한 가스 공급량을 60% 줄이겠다고 발표하자, 겨울철 난방 대란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내린 결정이다. ‘2030년 화력 발전 전면 폐쇄’라는 강력한 탄소 중립을 추진해왔던 독일이 러시아발 가스 위기 앞에서 환경보다 생존을 택한 것이다. 독일은 가스 수입량의 3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어,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경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경제 장관은 “우리를 흔들고 분열시키려는 푸틴의 전략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탈원전 기조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1일(현지 시각) 크리스티안 린드너 독일 재무장관은 베를린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연말까지 가동을 중단하기로 한 3개 원자력 발전소의 수명 연장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비상시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자력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었던 2011년, 원전 17기를 운영 중이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3기(4.2GW)만 남아있다. 이마저도 올해 말 가동을 중단할 계획이었지만, 에너지 대란에 수명 연장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린드너 재무장관은 이날 EU(유럽연합)가 2035년까지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금지하려는 계획에도 반대했다. 그는 “유럽의 내연차를 완전히 폐지하면 다른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그 틈새를 메울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이라면서 “독일은 내연기관차 금지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 정부는 EU의 강력한 전기차 전환 정책을 지지하고 주도해왔는데 이를 번복한 것이다. 현재 연정 체제인 독일 정부는 내부 균열 양상도 보이고 있다. 자민당 소속인 린드너 재무 장관과 달리 녹색당 슈테키 렘크 독일 환경부 장관은 같은 날 “EU의 내연기관차 금지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다만, 독일 핵심 부처인 재무부 장관이 EU 정책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만큼, 앞으로 EU의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정책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독일 메르켈 전 총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관계가 돈독했고, 이것이 유지될 것으로 믿고 강력한 탈원전·탄소 중립을 추진해왔다”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간과하다 생존 위기가 닥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