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베트남 현지 언론이 삼성의 R&D(연구 개발) 기지 1차 준공식 소식을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삼성이 총 2억2000만달러(약 2900억원)를 들여 하노이시에 동남아 최대 R&D 센터를 짓는 프로젝트로, 연내 완공한다. 최주호 삼성베트남 복합단지장은 “하노이 R&D 센터는 베트남을 전략적 생산 기지로 발전시키겠다는 삼성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중국 선전·톈진 등에 있던 통신 장비, 스마트폰 공장을 베트남·인도 등으로 이전하고 있다.
SK그룹도 중국에 매진하던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SK그룹은 1991년 한국 기업 최초로 베이징 지사를 설립하며 통신·주유소·반도체·배터리 사업에 적극 투자해왔다. 하지만 최근엔 미국·유럽·동남아로 투자처를 확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미국 인텔 낸드사업부를 인수했고, SK온은 총 5조원을 들여 미국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26일(현지 시각) 최태원 SK 회장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화상 면담을 할 정도로 미국 내 위상도 달라졌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중국에 치중돼 있던 생산 거점과 판매 시장을 다변화하는 구조 재편에 나서고 있다. 최근 주요 기업들은 중국 투자와 인력을 축소하는 한편, 미국·유럽·인도·동남아 등 비중국 투자를 늘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차이나 플러스 원’ 혹은 ‘차이나 플러스 투’ 전략이다.
◇투자·인력 재배치… 비중국 투자 늘린다
현대차는 중국 판매가 2016년 사드 보복을 기점으로 급감하자, 베이징 1공장을 매각했다. 중국 인력도 2016년 1만9447명에서 지난해 1만741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다. 대신 미국·유럽·인도·동남아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기아는 2019년 인도에 첫 공장을 세워 2년 만에 현지 판매 5위로 올라섰다. 현대차는 올 초 일본차 텃밭인 인도네시아에 그룹 최초 공장을 짓고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달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나 미국에 55억달러(약 7조원)를 투자해 해외 최초의 전기차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도 미국·유럽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3사가 미국에 배터리 공장을 짓기 위해 투자하기로 한 금액은 17조원에 이른다. 유럽 생산 능력도 확대하고 있다. LG는 폴란드에 5조원 이상 투입해 단일 공장으로는 전 세계 최대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구축했다. SK온은 헝가리 공장에 3조원을 추가 투입해 증설을 진행 중이다.
LG엔솔은 현대차와 인도네시아(총 1조4000억원)에, 삼성SDI는 최근 말레이시아(1조7000억원)에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하며 동남아 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반면 중국에 대한 대형 투자는 최근 SK온의 중국 4공장 신설(3조원), LG엔솔의 난징 공장 증설(1조2000억원) 정도만 계획 중이다.
◇반중 움직임 확산... 중국 시장 포기하진 말아야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계기로 ‘탈(脫)중국·반(反)러시아’ 움직임이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이 투자·인력 재배치를 통해 미국·유럽·중동 등 대안(代案) 시장도 활발히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관계를 지속하는 동시에 시장과 원자재 공급처,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 혹은 ‘차이나 플러스 투’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유신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중국이 미국의 견제로 주춤한 상황에서, 한국은 글로벌 시장과 연결되는 확장성을 바탕으로 신산업과 벤처기업들을 해외로 적극 진출시키는 전략에 집중하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이 주변국에 기술·인프라 투자를 통해 경제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전략)’ 프로젝트 역시 곳곳에서 반발에 부딪힌 상태다. 중국의 무리한 사업 추진과 독재자의 집권 연장 지원 논란 등으로 곳곳에서 반중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중국은 거대 시장을 바탕으로 놀라운 속도의 추격 능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혁신은 결국 개방된 체제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며 “한국은 세계 각국과 기술 협력을 활발히 진행하며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