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6일(현지 시각)부터 북미에서 조립하지 않은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한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날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고, 미 정부는 대통령 서명 직후 보조금 지원 대상 전기차 리스트를 공개했다. 당장 이날부터 북미 조립 차량 21개 모델에만 연말까지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의 70%가 북미 밖에서 제조된다는 이유로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는데, 현대차가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 5개 모델도 모두 탈락했다. 미국 소비자 입장에선 현대 전기차를 사려면 다른 차에 비해 최대 1000만원가량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북미에서 조립되고, 배터리 자재 혹은 부품을 미국·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일정 비율 이상 조달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번 발표는 단순 ‘북미에서 최종 조립’ 조건만으로 보조금 지급 전기차를 선별했지만, 미국은 내년 1월 새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예고했다. 내년엔 전기차에 탑재되는 배터리의 부품·광물의 북미 제조 비율까지 요구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당장 미국 시장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됐고, 국내 배터리 기업도 원자재의 중국 의존율을 줄이지 못하면 판매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처지에 놓였다. 한국 핵심 산업인 자동차와 배터리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미국 에너지부가 발표한 보조금 지급 대상 차량은 총 21개 모델이다. 미국에서 제조하는 자국 기업 포드와 스타트업 리비안·루시드의 전기차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내연기관과 배터리가 모두 탑재된 차량)가 모두 포함됐다. 해외 기업으로는 벤츠·아우디·BMW·지프·볼보의 북미 생산 일부 전기차·플러그인하이브리드, 아시아 기업 중에선 유일하게 닛산의 전기차 1개 모델(리프)만이 보조금 지급 대상이다. 테슬라와 GM은 북미 제조 기준을 충족했지만, ‘한 브랜드당 보조금 지급 최대 20만대’ 한도에 걸려 내년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이로써 기존 미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이었던 72개 모델 중 51개 모델이 제외됐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시장에서 판매 중인 아이오닉5, 코나EV, 제네시스 GV60, EV6, 니로EV 등 5개 모델도 제외 대상이라, 해당 모델을 구매하는 미국 소비자는 16일부로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판매 중인 5개 모델 모두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현재 미국 내 전기차 조립 라인이 없고, 조지아주에 짓기로 한 전기차 공장은 2025년 완공 예정이다. 현대차는 GV70 전기차와 EV9 등 일부 차종은 기존 미국 생산 라인을 전환해 현지 생산할 계획이지만, 아이오닉5 등 주력 차종은 장기간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전기차 시장 2위 현대차, 추격에 제동
현대차의 올해 상반기 미국 시장 전기차 점유율은 테슬라(70%)에 이어 2위(약 9%)였다. 테슬라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아이오닉5와 EV6 등 주요 모델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전기차로 호평 받으면서 미국 포드와 독일 폴크스바겐 등 쟁쟁한 기업들을 제쳤다. 현대차는 지난달까지 약 4만대 전기차를 미국에 수출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전기차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게 됐고, 시장 선점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예컨대 현대차가 올해(1~7월) 미국에서 1만5000대 넘게 판매한 아이오닉5의 미국 판매가격은 보조금을 제외하면 약 4만 달러(약5250만원)다. 비슷한 성능과 차급의 경쟁 모델 포드의 머스탱 마하E 가격은 4만4000달러(5800만원)로 기존엔 현대차가 500만원 이상 쌌다. 하지만 이제 머스탱 마하E는 보조금 지급 대상이고, 아이오닉5는 아니다. 보조금을 최대로 받은 포드 머스탱 마하E의 실제 구매가는 3만6500달러(4800만원)로 아이오닉5보다 450만원가량 저렴해진다.
게다가 미국은 이번에 누적 20만대로 제한한 브랜드당 전기차 보조금 지급 한도 조항도 폐지했다. 현재 테슬라·GM 전기차는 이미 20만대 이상 판매돼 올해 하반기 구매자는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내년부터 테슬라와 GM 전기차는 ‘20만대 상한’에 걸리지 않고 모든 판매 차량에 보조금이 지급된다. 전기차 선두 주자인 테슬라와 GM 등 미국 자동차의 입지가 더 굳어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내년부터는 배터리 요건도 추가
내년부터는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도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배터리 제조 지역과 원자재 조달에 대한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플레 감축법에 따르면 내년부터 전기차 보조금 7500달러의 절반(3750달러)을 받으려면 배터리의 핵심 자재(리튬·니켈 등)를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또 나머지 절반 보조금은 북미에서 제조되는 배터리의 주요 부품(양극재·음극재 등)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받을 수 있다. 2024년부터는 중국의 배터리 부품, 2025년부터는 중국 배터리 광물의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만약 국내 3사의 배터리가 미국 정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해당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는 내년부터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탈락하거나 보조금이 줄어든다. 따라서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미국 공장 완공을 서두르고, 광물·소재 공급망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최소화해야만 한다. 국내 배터리 3사는 GM·포드 등 주요 완성차 기업들과 배터리 공장 건립을 10곳 이상 추진 중인데 주요 공장의 완공 시점은 2023년에서 2025년 사이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현대자동차는 북미 제조 문제가 해결되는 2025년까지 경쟁에서 불리한 환경에 놓이게 될 것”이라며 “게다가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중국 공급망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국내 배터리 3사 제품을 파나소식 등 일본 제품으로 교체할 가능성도 있어 산업·외교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