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그룹 한 계열사의 재무팀은 최근 지방 은행으로부터 수십억원대 추가 대출을 받으려다 거절당했다. 금융 당국이 가계 대출뿐 아니라 기업 대출을 관리하라는 지침을 내려 대출 한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이 회사는 최근 회사채 금리가 급등하자 한 푼이라도 이자가 싼 은행 대출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지방 은행까지 대출을 조일 줄은 몰랐다”며 “우리 같은 우량 기업도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가상현실(VR)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한 임원은 “지난해 5억원을 투자한다는 곳이 있었는데, 더 좋은 투자자를 찾고 싶어 거절했다”며 “지금은 1억원조차 댄다는 곳이 없어 직원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과 이에 대응하는 한은의 빅스텝이 이어지는 가운데, 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기업조차 자금줄이 조여들고 있다. 자금 경색이 지속되면 한계 기업들은 만기가 도래한 부채를 갚지 못해 줄도산에 처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회사채 시장은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1~23일 회사채 발행액은 전년 동기 대비 62% 감소한 2조8214억원에 그쳤다. 코로나 영향이 컸던 2020년 같은 기간(5조9579)의 절반도 안된다. 회사채 금리는 고공 행진 중이다. 지난 23일 신용등급이 AA-인 기업의 무보증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연 5.12%, BBB-인 기업은 연 11.04%까지 오르며 연고점을 기록했다.
실제 한 배달 플랫폼 운용사는 최근 투자금이 바닥나 애를 태우고 있다. 직원이 400여 명인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3089억원까지 늘었지만 적자(368억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창업자 주식을 담보로 받은 대출 360억원(연이율 9%) 만기가 11월 도래한다. 사업을 지속하려면 700억원대 자금이 수혈돼야 하지만, 불확실한 경기 속에서 선뜻 거액을 투자할 기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껏 높은 몸값을 부르며 화려한 IPO(증시 상장)을 기대했던 유망 스타트업들도 최근 주식 시장이 망가지자 자세를 낮추고 있다. 사업 자금이 당장 급한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IPO에 나서고 있다. 차량공유업체 쏘카는 지난달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상장을 강행했다. 당초 희망 공모가 대비 38% 낮춘 가격(2만8000원)에, 공모 규모도 당초 계획의 절반(1019억원)으로 줄여 상장했다. 그만큼 사업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SK온은 향후 상장을 약속하고 지분 투자를 유치하는 ‘프리 IPO’에 나서고 있다. 미국 배터리 공장 설립을 위한 조단위 투자금 조달을 위해 당초 제안(5.5%) 대비 더 높은 수익률(7.5%)을 제시하면서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에게 투자를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초 ‘IPO 막차’를 탄 LG에너지솔루션이 10조원의 자금을 조달한 것과 달리, SK온은 한발 늦는 바람에 투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속을 끓이는 상황이 됐다.
대형 투자를 유보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26일 3600억원 규모의 석유제품 제조 설비 투자를 중단하기로 했다. “코로나와 인플레에 따른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공사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밝혔다. 한화솔루션은 지난 7일 1600억원 규모의 질산유도품(자동차 시트 주원료) 생산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코로나 때 부도가 났어야할 한계 기업들이 양적 완화로 생명을 연장해 왔지만, 지금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며 “구조조정과 경기 침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1980년대 미 볼커 전 연준 의장이 금리를 20%까지 인상했을 때, 1998년 외환위기로 국내 금리가 20%까지 갔을 때 부실기업 뿐 아니라 우량기업들도 도산했다”며 “추가 금리 인상이 예고되고 있어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충격이 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