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튬과 희토류는 곧 석유와 가스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의존해선 안 된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연례 국정 연설에서 ‘유럽 주요 원자재법(European Critical Raw Material Act, RMA)’을 제정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중단되자 에너지 대란 위기에 처한 유럽이 원자재 전쟁에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라이엔 위원장은 “문제는 한 나라(중국)가 거의 모든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주요 원자재의 추출부터 정제·가공·재활용을 전략적으로 식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에 이어 유럽이 ‘탈중국’ 공급망 구축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양대 공급망 동맹이 결성되는 가운데, 한국이 공급망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시급히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판 반도체·배터리 동맹
미국은 ‘칩4 동맹’과 ‘반도체 지원법’, 그리고 ‘인플레 감축법’을 통해 자국 중심의 반도체·배터리 공급망 구축과 첨단 산업 동맹 결성에 나서고 있다. 유럽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유럽은 지난 2월 ‘유럽 반도체법(Chip Act)’을 발표하면서 총 450억유로(약 63조원)의 공공·민간 투자·지원과 규제 완화 계획을 발표했다. 9% 수준인 유럽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까지 높이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번엔 ‘원자재법’을 들고 나왔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진 않았지만, 반도체·전기모터·배터리에 필수적인 희토류·리튬 같은 주요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현지 및 동맹국 생산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라이엔 위원장은 원자재 확보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로 호주·인도·칠레·멕시코·뉴질랜드를 대놓고 언급했다. 재계 관계자는 “유럽은 러시아에 의존해온 것에 큰 반성을 하면서 똘똘 뭉치고 있다”며 “그동안 중국에는 큰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던 유럽에서 독재 국가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이 원자재 독립을 위해 2026년 시행을 예고한 ‘EU 배터리 여권제’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배터리 여권제는 배터리의 생산·이용·폐기·재활용 같은 이력을 영구 보존하는 것으로, 유럽 내에선 유럽의 환경·인권 규제에 부합하는 배터리만 사용하는 것이 목표다. 김희영 무역협회 연구위원은 “배터리 여권에는 재료의 원산지까지 기록하도록 돼 있어, 이를 중국산 재료·부품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 수혜 보려면 ‘탈중국’ 과제
유럽이 원자재법을 추진하면, 한국의 배터리 업계 입장에선 미국에 이어 유럽 시장에서 중국의 경쟁 업체들을 따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 시장은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미국 자동차 빅3(GM·포드·스텔란티스)와 합작하면서 테슬라 파트너인 파나소닉을 제외하면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상태다. 하지만 유럽 시장은 혼재 양상이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미국 진출이 가로막히자, 유럽 시장 확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세계 1위 배터리 기업 CATL은 독일에 14GWh(기가와트시) 규모 공장을 짓고 있고, 지난달엔 헝가리에 약 10조원을 투자해 100GWh 규모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2025년까지 완공해 벤츠·폴크스바겐·BMW·스텔란티스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CATL은 최근 북미 공장 설립 계획을 보류한 반면, 유럽에 제3 공장 설립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엔비전그룹도 닛산과 합작한 영국 배터리 공장, 르노그룹과 합작한 프랑스 공장을 짓고 있다.
유럽 내 자체 육성된 배터리 업체들도 급성장 중이다. 스웨덴 노스볼트는 폴크스바겐의 주요 파트너이고, 영국 브리티시볼트도 수년 이내 대량생산 능력을 갖출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유럽 업체들이 대량생산을 본격화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미 대규모 공장을 보유한 한국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며 “유럽 공급망 동맹에서 수혜를 보려면 소재·부품에서 중국에 의존적인 구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