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한 국제기구에서 2년째 일하는 미국인 크리스토퍼(42)씨는 최근 1년 이상 몰던 독일제 중형 세단을 팔고, 한국 현대차 SUV 바이욘(현대 i20 기반 소형차)을 샀다. 그는 “차고도, 길도 좁은 데다 연료 가격도 미국의 1.5배라 중형차는 유지하기 너무 어렵다”고 “왜 이곳에선 다들 작은 차를 타는지 알겠다”고 했다.
실제로 유럽·일본에서는 대부분 국민이 소형차를 선호한다. 유럽·일본은 좁은 도로, 밀집한 주택과 열악한 주차 환경 같은 조건도 주요 원인이지만 큰 차 수요를 강력히 억제하는 정책 영향도 크다. 이뿐이 아니다. 독일·프랑스에서는 택배 트럭이나 오토바이 대신 택배 전용 자전거가 물건을 배달한다.
◇강력한 큰 차 억제 정책
프랑스는 중·대형, 고배기량 차량에 세금을 중과한다. 자동차의 최고 출력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반영해 계산하는 행정마력(puissance fiscale)을 기준으로 각종 자동차 세금을 매긴다. 등록세의 경우 경차나 소형차의 경우 지방별로 130~200유로(약 18만~27만원)가 고작이지만, 200마력이 넘는 중형 차량은 400~800유로(약 55만~110만원)를 내야 한다. 이런 차들은 1㎞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28g을 넘으면 부과되는 수천 유로의 ‘CO2 페널티’까지 붙고, 차량 무게가 1.8t이 넘을 경우 중량세가 또 붙는다. 소형차엔 이익을 주고, 대형차엔 불이익을 주는 이른바 ‘보너스(bonus) 앤 맬러스(malus)’ 제도다. 한국 승용차의 무게가 보통 1.8t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강력한 규제이다.
일본의 경우 주차 공간 확보를 의무화하는 ‘차고지 증명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다수 지자체가 ‘케이 카(일본말로 경차)’로 불리는 660cc 미만의 차량은 차고지 증명 의무를 면제해 주고 있다. 또 경차는 에코카로 분류돼 큰 폭의 세제 혜택을 받는다. 현대차가 일본에 출시한 아이오닉5가 너무 커서 일본의 기계식 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경차 중심의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한국도 경차에 대해 개별소비세와 취·등록세 면제, 공영주차장 할인 같은 기본적인 혜택은 제공하지만 유인 효과는 약하다. 게다가 소형차에 대한 혜택은 거의 없다. 권은경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실장은 “한국 상황에선 경차에 각종 혜택을 집중하기보다 소형차로 수요를 유인하는 정책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걷기·대중교통 이용 운동 펼치는 유럽
지난 9일 파리 시내에선 ‘택배용 전기 자전거’가 달리고 있었다. 전기 자전거 뒤에 미니 컨테이너 박스를 장착한 이 자전거는 페달을 밟으면 전기 모터에 힘이 보태진다. 파리나 베를린에선 전기 자전거나 전기 카트로 택배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파리에서 만난 아마존 배달원 무멧(24)씨는 “좁은 파리 거리를 누비기에는 전기 자전거나 카트가 안성맞춤”이라며 “이 자전거로 하루 100개 이상 물건을 배달하기도 한다”고 했다. 1t 디젤 트럭으로 하루 200~300개씩 배송하는 한국보다 적지만, ‘총알 배송’ 경쟁을 하지 않고, 배송에 2~3일이 걸려도 불평하지 않는 문화 덕분에 전기 자전거 배송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또 30년 전 독일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에 퍼진 ASI(Avoid, Shift, Improvement) 캠페인이 최근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차를 타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Avoid), 자가용 탈것은 대중교통으로, 대중교통 탈것은 걷기로 ‘전환(Shift)’하고, 차량 에너지 효율을 개선(Improvement)하자는 의미다. 노르웨이는 ‘전기차도 차’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교통, 걷기를 우선하자”며 전기차 보조금을 대폭 없앴다. 일본에선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에너지 절약법’을 제정해 범국민적 에너지 감축을 실행해오고 있다.
도시 계획을 ‘걷기’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기도 한다. 지난 2020년 1월 파리 시장 안 이달고가 내놓은 ‘15분 도시’라는 개념은 유럽 전 도시로 확산하고 있다. 시민이 도보나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출퇴근은 물론 필요로 하는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시 인프라를 재편성하려는 움직임이다. 배충식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에선 차량 5부제, 운전습관 개선 캠페인마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라면서 “지금은 국가적 차원에서 다시 에너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