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루시드모터스가 19일(현지 시각) 유상 증자를 통해 15억 달러(약 2조원)의 자금을 조달했다고 발표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신생 기업이 거액을 조달할 수 있었던 건 루시드모터스를 전폭 지지하는 ‘키다리 아저씨’ 사우디국부펀드(PIF)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국부펀드는 2018년부터 루시드모터스 투자에 참여해 지분 62%를 확보한 최대주주로, 이번 유상증자에서 1조2000억원 투자에 참여했다.

운용 자산이 6200억달러(800조원)에 달하는 PIF는 최근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하며, 잠재력 있는 기업들을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머니’가 글로벌 긴축에 따른 현 위기를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사우디가 투자하고 있는 분야도 자동차부터 게임·축구구단·금융까지 그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자동차·게임·축구에 관심 많은 빈 살만

최근 PIF가 직접 투자한 기업들을 살펴보면 빈 살만 왕세자의 개인 취향이 크게 반영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지대한 것으로 보인다. PIF는 지난 9월 영국 전통 수퍼카 애스턴마틴의 지분 18.7%를 인수해 2대주주에 올라섰다. 당시 애스턴마틴은 PIF와 중국 지리차를 대주주로 영입해 자금난에서 겨우 벗어났다. PIF는 영국의 또 다른 고급차 브랜드 맥라렌과 이탈리아 수퍼카 파가니의 지분도 갖고 있으며 테슬라의 초기 투자자이기도 했다. 2018년 테슬라 주식 4100만주를 매입한 PIF는 테슬라 주가가 급등하기 전인 지난 2020년 3월 모두 매도했다. 일론 머스크가 2018년 테슬라를 상장 폐지하겠다는 소동을 벌이면서 PIF가 자금을 대기로 했다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 양측 사이에 진실 공방이 벌어지며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37세인 빈 살만 왕세자는 ‘게임광’으로도 알려졌는데, 최근 PIF는 유력 게임회사들을 향한 투자도 활발하다. 지난 5월 PIF는 3조7000억원을 투자해 일본 최대 비디오 게임사인 닌텐도 지분 5.01%를 사들였다. 앞서 올 초에는 1조원 이상 투자해 엔씨소프트 지분 9.26%를 인수, 김택진 대표에 이은 2대주주에 올랐다. PIF는 1조원을 들여 넥슨 본사인 넥슨재팬 지분도 7%가량 인수했다.

축구광인 빈 살만 왕세자는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축구단 인수에도 성공했다. PIF는 자신들이 지분 80%를 태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난해 EPL을 대표하는 축구단인 뉴캐슬유나이티드를 6500억원에 사들였다. 사우디 정부가 구단 운영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감수하고 축구단을 인수한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축구 강국 아르헨티나를 2대1로 이기자 인스타그램에 가족과 함께 환호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파산 위기 크레딧스위스 인수… 금융까지 보폭 넓혀

최근 파산 위기에 처한 스위스 2위 투자은행 크레딧스위스(CS)의 구세주로 나선 것도 사우디다. CS는 지난해 4월 미국 월가를 뒤흔든 아케고스캐피털 마진콜 사태에 자금이 물려 50억달러의 막대한 손실을 안고 경영난에 빠졌다. 여기에 총 100억 달러를 조성해 투자한 그린실캐피털 파산까지 겹치면서 올 상반기에만 2조6000억원의 손실을 냈다. CS가 ‘제2의 리먼브러더스’가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상황에서 지난 10월 사우디국립은행은 CS에 42억달러(5조4000억원)를 투자하며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여기에다 사우디국립은행의 주요 주주인 빈 살만 왕세자가 따로 5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사우디는 석유에만 의존하는 ‘단일 품목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을 활용해 다양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며 “지금은 위기를 겪지만 기본이 튼튼하고 성장 잠재력 있는 기업들에 투자하면서 전 세계 산업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