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재무부가 IRA(인플레감축법)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지급 기준이 되는 배터리의 세부 조건을 31일(현지 시각) 발표하면서 완성차·배터리 업계가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산업부는 “우리 업계 요구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고 했고, 배터리 업계도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됐다”는 입장이다. 일단 한숨을 돌린 모습이지만, 미 재무부가 일본에도 FTA(자유무역협정) 체결국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일본 배터리 업계에 큰 혜택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배터리 시장은 중국·한국·일본이 주도하는데, 국내 배터리 3사의 누적 수주액만 1000조원에 달할 정도로 배터리는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그런데 일본 배터리가 미국 시장에서 우리 기업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배터리 시장은 ‘탈(脫)중국’이 핵심인 IRA로 한국 배터리의 텃밭이 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지만, 일본이 급부상하는 데다 중국도 IRA 우회로를 찾아 미국으로 진격하고 있어 앞으로 시장 쟁탈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숨 돌렸지만, 파나소닉 경쟁력 높아져
IRA 세부 조건 발표 이후 국내 배터리 업계가 한숨을 돌린 주요 이유는 IRA가 규정하는 ‘배터리 핵심 광물’에 배터리 중간 재료인 양극재·음극재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IRA는 북미에서 조립한 전기차에 한해 최대 7500달러의 보조금을 준다. 하지만 전기차에 실리는 배터리가 2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첫째로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광물 조건’을 충족하면 절반(3750달러), 둘째로 배터리 ‘핵심 부품 조건’을 충족하면 나머지 절반을 준다. 핵심 부품 조건은 북미에서 50% 이상 제조해야 한다는 규제가 명확해 북미에 배터리 공장을 짓지 않으면 조건 충족이 어렵다. 하지만 핵심 광물은 다르다.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40% 이상 추출·가공한 경우에 인정받는다. 한국은 미국과 FTA를 맺고 있어 국내서 양극재·음극재를 생산하는 LG화학·포스코퓨처엠·에코프로비엠 같은 기업들은 생산지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자국 내에서 양극재·음극재 생산이 활발한 일본은 미국과 FTA를 맺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와 같은 조건이 됐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맺은 핵심광물협정 덕분에 FTA 체결국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가장 수혜가 예상되는 업체는 테슬라의 오랜 파트너인 파나소닉으로 분석된다. LG에너지솔루션과 파나소닉은 테슬라 납품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파나소닉은 미국에 공장이 있지만, 핵심 광물을 일본에서 공급받기 때문에 7500달러 중 절반밖에 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FTA 체결국 지위가 되면서 파나소닉 배터리도 7500달러 보조금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됐다.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작년 말 재무부 가이드라인이 나왔을 때 테슬라는 LG에너지솔루션 물량을 늘리기로 했지만, 이제 테슬라 입장에선 굳이 LG 물량을 늘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대한 핵심 광물 의존도가 높은 한국 배터리 업계가 오히려 불리해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2024년까지는 중국산 흑연이나 리튬을 수입해 한국에서 음극재·양극재를 만들어도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2025년부터는 미국이 정하는 ‘해외우려 집단’이 채굴·가공·재활용한 광물은 사용이 금지된다. 여기에는 중국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수산화리튬·코발트·흑연의 중국산 수입 비율이 80%가 넘을 정도로 배터리 공급망을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어서 1~2년 내 중국 이외로 광물 공급망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포드 이어 테슬라까지 CATL 끌어들여
중국 배터리 업체들도 우회하는 방식으로 미국 배터리 시장을 노리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블룸버그는 테슬라가 중국의 배터리 업체 CATL과 텍사스에 배터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이 문제를 백악관 관계자들과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가 지분 100%를 갖되 기술은 CATL로부터 제공받는 배터리 공장을 미시간주에 건설하려는 것처럼 테슬라도 같은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중국 배터리 기업 궈시안도 미시간주에 배터리 공장을 추진 중이다. 궈시안은 미국 스타트업 아워넥스트에너지(ONE)와 제휴하는 방식으로 IRA를 우회해 전기차 배터리, 양극재·음극재까지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자동차 메카였던 미시간주는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중국 업체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상황이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바이든 정부는 미국 전기차 산업 발전을 위해 중국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기술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고, 이를 내재화하기 위해 포드-CATL 같은 형태의 협력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이번 IRA 배터리 지침은 미국이 배터리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한국·일본 같은 우방 국가를 끌어들인 것으로 ‘미국 우선주의’의 결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