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는 올 하반기 자체 설계 배터리를 탑재한 하이브리드 차량을 출시한다고 지난 21일 밝혔다. 양산 차량에 현대차가 직접 설계한 배터리가 사용되는 건 처음이다. 일본의 도요타도 지난 12일 기술 설명회에서 LFP(리튬·인산철), 전고체 배터리(리튬이온 배터리를 대체할 차세대 배터리)를 직접 설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배터리를 납품받아 생산 차량에 탑재하는 데 그쳤던 완성차 업체들이 직접 배터리 설계에 뛰어들고 있다. 배터리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반도체처럼 배터리 분야에서도 ‘파운드리(위탁생산)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완성차 업체가 설계 전문 회사인 ‘팹리스’ 역할을 하고,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역할은 배터리 업체가 맡는 방식이다. 이처럼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설계에 뛰어드는 건 전기차 가격의 30~4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을 지금처럼 배터리 업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끌려다닐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가격 인상 위험뿐 아니라 공급망 불안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배터리 관련 기술을 내재화(內在化)하는 게 완성차 업체에도 필수인 시대가 온 것”이라고 했다.
◇현대차, 도요타도 테슬라처럼
현대차가 자체 설계한 배터리는 NCM(니켈·코발트·망간) 계열로 니켈 함량을 크게 높여 주행거리를 늘리는 방식이 사용됐다. 현대차는 이를 배터리 제조사인 SK온에 위탁 생산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최근 수소차 성능 테스트를 위한 차량인 ‘N비전74′에 탑재한 리튬 배터리도 직접 개발했다. 현대차는 배터리 설계를 위해 2021년 남양연구소에 개발 전문 조직을 만들고 전문 인력을 확충해 왔다. 최근엔 소규모 생산까지 가능하도록 시범 라인을 만드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도요타도 최근 “자동차 회사가 만드는 가슴 설레는 배터리를 기대하라”며 LFP(리튬인산철), 전고체 배터리 개발 계획을 밝혔다. 도요타는 2026년 LFP, 2027년 전고체 배터리 등 상용화 시기를 구체적으로 못 박으며 기술 구현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요타는 전고체 배터리 관련 특허를 1300여 건 가지고 있다.
글로벌 전기차 1위 테슬라의 경우 이미 배터리 파운드리화를 넘어 자체 양산 단계까지 진행됐다. 테슬라는 올 초 차세대 배터리로 불리는 4680(지름 46㎜, 길이 80㎜) 원통형 배터리 1000만개를 생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폴크스바겐도 배터리 자회사 파워코를 만들고 2030년까지 배터리 부문에서만 매출 200억유로(약 28조6000억원)를 올리겠다고 했다.
◇주행 데이터의 힘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설계에 뛰어드는 건 전기차에서 배터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의 배터리는 내연기관차의 엔진만큼이나 중요한데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를 외부에서 공급받는 건 엔진 자체를 공급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현재 배터리 가격(팩 기준)은 kWh(킬로와트시)당 150달러(약 19만5000원)가량이다. 77.4kWh 배터리가 탑재된 아이오닉5의 경우 1500만원이 배터리 비용이란 뜻이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각국이 원자재를 무기화하면서 여전히 배터리 가격이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며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핵심 부품을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설계의 핵심인 주행 데이터를 가진 것도 직접 배터리 설계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터리는 주행 때 열 관리, 운전 습관 등에 따라 성능 구현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술 보완 등을 위해 주행 데이터가 중요하다. 주행테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완성차 업체가 설계 측면에서 배터리 업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당분간 배터리 업체들이 설계와 양산을 모두 담당하겠지만,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배터리의 규격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배터리 파운드리화는 가속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