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업계에서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 10국이 모인 아세안(ASEAN)을 ‘제2의 일본’이라고 부른다. 아세안 국가는 작년 기준 인구가 6억7944만명에 달하는데, 이 지역의 자동차 시장을 1960년대부터 현지 진출한 도요타·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이 반세기 넘게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에 최근 현대차·기아 등 한국 자동차 회사가 전기차를 앞세워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연기관차 중심일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세계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전기차 대전환이 시작되면서 기회가 생겼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과 성능을 인정받은 ‘K 전기차’인 만큼 아세안 시장에서도 일본차와 ‘한일전’으로 한판 승부를 겨뤄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아세안 주요 국가들이 전기차 인프라 구축을 서두르는 것도 호재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 파나소닉 등이 차지한 아세안 지역 가전 시장을 삼성·LG 등이 기술력을 앞세워 파고 들어간 것처럼, 이번엔 한국 전기차가 아세안 시장에서 충분히 일본을 제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래픽=김현국

◇아이오닉5, 인도네시아 올해 1위 전기차

아세안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과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올해 91% 대(對) 3%다. 하지만 전기차만 놓고 보면 한국차 점유율이 57%, 일본차는 7%다. 이 나라에서 올해 1~7월 현대차의 전기차인 ‘아이오닉5′가 3819대 팔려 전기차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일본 도요타의 BZ4X 판매량은 같은 기간 362대에 그쳤다. 내연차에선 일본에 밀리지만 전기차에서는 한국이 앞서가는 셈이다.

이는 현대차가 지난해까지 수천억원을 투입해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에 전기차 생산 시스템을 갖춘 덕분이다. 인도네시아 내수 시장뿐만 아니라 전기차 전환을 추진하는 태국, 베트남 등 아세안 시장까지 고려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자동차 회사 중에선 처음으로 현지 전기차 생산을 결정했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대차가 아세안 지역에 완성차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그룹 내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아세안 시장 진출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핵심 생산기지로 생각했던 중국에서 2017년 사드 사태로 판매가 급감하면서 ‘탈(脫)중국’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와 함께 세계적인 전기차 전환이라는 변화도 닥쳤다. 내연차로는 일본을 이기는 게 불가능했지만, 경쟁력이 앞선 전기차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게 경영진의 판단이었다.

◇아세안 곳곳에 한국 미래차 R&D 센터도

아세안 일대에는 K전기차 생산을 위한 공급망도 본격적으로 갖춰지고 있다. 현대모비스가 지난 5월말 자카르타 인근에 전기차 배터리 시스템 공장을 착공했다. LG에너지솔루션이 현대차와 합작해 1조2000억원을 투자한 배터리셀 생산 공장도 내년 가동된다. 연간 전기차 15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다. 배터리 핵심 광물인 니켈 매장량 1위인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소재를 조달하고, 배터리를 만들고, 전기차까지 생산하는 구조가 갖춰지는 것이다.

아세안 지역에 미래차 R&D(연구·개발) 거점도 만들어지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말 싱가포르에 ‘글로벌 혁신센터’ 문을 연다. 다양한 미래차를 실험적으로 생산하면서 R&D를 함께 하는 곳이다. LG전자는 베트남 하이퐁에 있던 자동차 전장 R&D(연구·개발) 센터 인력을 2024년까지 1000명까지 늘리는 등 확장하기로 했다. 아세안 지역 소비자 취향에 적합한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소프트웨어 개발 등을 맡는다.

◇내년부터는 ‘한·중·일 삼국지’

아세안 지역 자동차 시장의 한일전은 치열해질 전망이다. 우선 도요타가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앞으로 5년간 인도네시아에 18억달러(약 2조2000억원)를 투자해 생산설비를 확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현대차처럼 현지형 내연기관차뿐만 아니라 전기차도 생산하겠다고 했다. 태국 공장도 생산 설비를 더 늘릴 계획이다. 여기에 중국 기업들도 경쟁에 가세한다. 중국 전기차 판매 1위 업체인 BYD(비야디)가 내년부터 태국에서 전기차 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우링도 지난해부터 현대차에 이어 인도네시아 전기차 현지 생산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