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자동차 시장 규모가 큰 영국이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전면 중단하는 ‘완전한 전기차 전환’ 시점을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추겠다고 20일 발표했다. 영국은 유럽에서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2050년 탄소 배출 제로(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유지하지만 실용적 접근을 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전기차 ‘속도 조절’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탄소 배출 제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내연차 조기 퇴출을 선언했던 국가들에서 전기차 전환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내연차 퇴출로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자동차 산업 종사자들의 반발, 각국의 전기차 보조금이 줄어들고 내연차보다 30% 안팎 가격이 비싸 판매가 주춤한 상황, 전기차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투자 부담,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데서 오는 불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지난 15일부터 미국에서는 전미자동차노조(UAW)가 일자리 감소 우려 등을 이유로 GM(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빅3′를 상대로 부분 파업에 돌입했다. 자동차 종주국으로 꼽히는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전기차 경쟁력이 강한 중국에 자동차 시장을 내줄 수 있다”며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추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 “내연기관 퇴출 늦춰라”
유럽은 세계에서 자동차 시장 규모가 중국,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이다. 세계 최초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든 기업인 메르세데스 벤츠를 비롯, BMW·폴크스바겐·르노·푸조·시트로엥 등 100년 안팎의 자동차 기업이 즐비하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이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중단하는 목표를 내세우면서, 유럽은 전기차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지난 6월 처음으로 신차 판매 중 전기차 비율이 15.1%로 디젤차(13.4%)를 앞섰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까지 합하면 약 47%로 절반에 육박한다. 한국은 이 비율이 약 25%다.
이런 급속한 전기차 전환에 유럽 내부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자동차 회사 입장에선 전기차를 팔아서 수익을 남기기 어렵다.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수익이 날 만큼 규모의 경제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전기차 판매 증가세마저도 주춤하면서 단기간 수익을 내기도 쉽지 않다. 최근 중저가 전기차를 앞세운 중국 기업에 그나마 있는 전기차 시장까지 잠식당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일(현지 시각) 중국, 한국 등 아시아에서 생산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을 축소하는 내용의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을 확정했다. 자국 전기차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다. 또 EU 의회는 2035년 이후 내연기관차를 팔지 못하도록 해놓고도 지난 3월 ‘이퓨얼(합성 연료)을 이용한 내연기관차는 계속 판매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을 만들었다. 이퓨얼은 가솔린이나 디젤 대신 내연차의 연료로 쓸 수 있는데, 폴크스바겐, 포르셰 등 독일 업체들이 앞서 있는 분야다. 이탈리아에서도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가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는 중국 회사들에 선물을 안겨주는 꼴이고, 유럽의 자살 행위”라며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車 노조 파업 원인도 ‘전기차 전환’
미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빅3′를 상대로 파업을 하는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속내에는 전기차 전환으로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평소 친민주당 성향인 UAW는 내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하지 않고 있는데, 바이든 행정부가 빠르게 전기차 보급을 늘리는 것에 대한 불만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반면 내연기관 중심의 자동차 회사들은 노조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 노조 요구대로 임금 인상을 하고 일자리 보전을 해줄 경우, 비용이 늘어나면서 테슬라 등을 추격하는 게 어렵다.
자동차업계는 영국발 전기차 속도 조절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계산에 들어갔다. 영국 현지 자동차 기업들은 표면적으로는 “정책 일관성이 떨어져 기업과 소비자에게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전기차 전환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럽 배터리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이 60% 이상인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전기차 속도가 느려질 경우 상대적으로 손해가 클 수 있다. 반면, 내연기관과 전기차 중간 단계로 꼽히는 하이브리드차 경쟁력을 갖춘 도요타나 현대차그룹은 상대적으로 이런 변화가 호재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