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싱가포르 서쪽 주롱 혁신지구에 문을 연 현대차 글로벌 혁신센터 내 품질 점검 ‘셀’에서 로봇 개와 작업자가 자동차 조립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로봇 개가 탑재된 카메라로 조립 부분을 촬영하면, 로봇 개와 연결돼 있는 AI(인공지능) 프로그램에서 해당 부분이 제대로 조립됐는지 판별한다. /현대차

21일 싱가포르 서쪽 주롱 혁신지구에서 문을 연 현대차그룹 ‘글로벌 혁신센터’에 들어서니 자동차 공장의 당연한 풍경으로 여겨졌던 길게 뻗은 컨베이어 벨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차체나 부품 상자를 실은 운반 로봇 수십대가 타원형 기둥으로 구분된 소규모 작업장인 여러 ‘셀(cell)’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들어가는 대형 콘솔 등 무거운 부품을 주로 조립하는 셀에 가까이 가니 운반 로봇에 실려온 현대차 전기차 모델 ‘아이오닉5′ 차체가 보였다. 약 2m의 로봇 팔 4개가 부품 상자에서 10㎏짜리 보조 배터리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차 보닛 안쪽에 능숙하게 조립했다. 조립이 끝나자 운반 로봇이 차체를 끌고 다음 셀로 이동했다.

현대차그룹이 이날 3년 만에 준공한 글로벌 혁신센터는 세계 최초 ‘셀 방식’ 주문형 완성차 생산 시설이다. 싱가포르가 첨단 산업단지로 육성하고 있는 주롱 혁신지구 내 약 4만4000㎡(약 1만3000평) 땅에 들어선 7층짜리 건물로, 연간 최대 3만대를 만들 수 있다.

일반 자동차 공장에서는 차체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두고 부품을 하나씩 붙여가며 차를 완성한다. 하지만 이곳에선 벨트 대신 각종 부품과 차체를 센터 곳곳으로 옮긴다. 겉모습이 같은 차라도 어떤 장치가 달려 있느냐 등에 따라 생산 과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혁신센터를 만든 것은 미래차 경쟁을 위한 다품종 소량 생산 실험을 위한 것이다. 상당수 자동차 전문가는 “가까운 미래에 매년 수천만대의 차를 만드는 대량생산 시대가 저물 것”이라고 예상한다. 자율 주행차나 커넥티드카 등 모빌리티의 활용도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정의선 회장 역시 다양한 소비자의 입맛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을 강조해 ‘싱가포르 투자’를 과감하게 진행한 것이다. 이곳에서 개발한 자동화 기술 등 각종 생산 기법은 내년 말 가동 예정인 미국 조지아 전기차 공장과 2026년 가동되는 울산 전기차 공장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생산 기술을 선도하는 ‘마더(mother) 팩토리’이자 ‘테스트 베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날 오후 센터 준공식에서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맞춰 나가기 위해 제조업의 개념을 완전히 새로 정의하려고 만든 곳”이라며 “품질을 높이고 비용을 아끼는 효과도 크다”고 했다. 이어 “할아버지 정주영 선대 회장은 ‘혁신은 늘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며 “여기서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해도 좋다. 그래야 혁신할 수 있다”고 했다.

21일 싱가포르 주롱혁신지구의 현대차 글로벌 혁신센터 준공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로런스 웡 싱가포르 부총리 등 행사 참석자들에게 혁신센터 건립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현대차

◇사람보다 로봇이 더 많이 보였다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은 차체를 만들고 색을 입힌 뒤 , 완성된 차체에 각종 부품을 장착하는 순으로 이뤄진다. 글로벌 혁신센터에선 외부에서 가져온 완성된 차체에 부품을 장착하는 작업을 한다.

이날 이곳에선 사람보다 로봇이 훨씬 많이 보였다. 27개 셀 사이를 운반 로봇 수십대가 오가는 등 센터 전체에 로봇만 200여 대가 있어서다. 셀 11곳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이 로봇 팔만 작업하는 공간이다. 레이더·센서 등을 장착한 로봇들은 5G 통신망을 타고 실시간으로 작업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움직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차 한 대를 만들 때 자동화 작업 비율을 64%까지 높였다. 현대차의 다른 공장들의 평균 자동화 비율은 14% 안팎에 그친다. 혁신센터 전체 직원 280명 중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단 50여 명이고 로봇·AI·SW(소프트웨어) 등과 관련된 R&D(연구·개발) 인력이 130명 안팎이다.

현대차가 인수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개발한 로봇 개 ‘스폿’에 AI(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장착해 품질 점검도 한다. 로봇 개가 몸에 장착된 카메라로 자동차 조립 부위를 촬영하면 AI가 외형을 보고 조립이 제대로 되었는지 판별하는 방식이다. 또 셀 주변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은 하체나 상체에 신체 부담을 덜어주는 웨어러블 로봇도 입고 있었다.

◇디지털 트윈 기술에 주행 트랙까지

글로벌 혁신센터는 또 디지털 공간에 혁신센터 생산 시설과 똑같은 가상 공장을 만들어 새 기술을 시험해보는 디지털 트윈 기술도 적용됐다. 또 건물 옥상에는 620m짜리 트랙도 만들었다. 전문가가 모는 차에 동승해 고객들이 고속·곡선 주행 등 차량 성능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현대차가 혁신센터를 싱가포르에 만든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핵심 시장이 될 아세안에서 가장 교역 규모가 크면서 투자금과 인재들이 모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혁신센터 가동을 계기로 현대차는 싱가포르 정부 산하 기술개발연구소인 과학기술청,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과 협약을 맺고 대학·정부·기업 합작 연구소를 만들기로 했다. 미래 제조업 생산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인재 양성도 함께 한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