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공장을 현지 업체에 1만루블(약 14만원)을 받고 매각하기로 19일 결정했다. 작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공장이 2년 가까이 가동 중단된 상태에서 루블화 가치까지 폭락해 공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번 매각에는 2년 내 현대차가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항이 포함됐지만, 러시아 정부 승인이 필요하고 매입을 위해서는 가격 협상을 다시 해야 해 손실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번 매각은 러시아 상황뿐 아니라 미·중 갈등과 전기차 전환을 맞아 미국과 아세안 시장 공략을 강화하는 현대차의 글로벌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차는 러시아·중국 등 기존 신흥 시장 대신 미국과 아세안 등에 생산 거점을 확보하며 시장을 넓히고 있다.
◇단돈 14만원에 러시아 공장 넘겨
현대차는 이날 임시 이사회를 열고 러시아 공장 지분을 현지 투자 회사인 아트 파이낸스에 1만루블에 매각하는 안을 승인했다. 현재 이 공장 지분은 현대차가 70%, 기아가 30% 갖고 있는데, 두 회사 지분을 모두 넘기는 것이다. 이 14만원에는 2020년 현대차가 500억원에 인수한 GM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도 들어 있다. 이번 계약에는 현대차가 2년 내에 공장 지분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도 포함됐다. 현대차 러시아 공장의 장부상 가치는 약 4100억원인데, 되살 때는 다시 협상을 진행해 가격을 정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현대차가 2년 동안 약 5400억원을 투자해 2010년 9월 완공했다. 당시 현대차의 6번째 해외 생산 시설이었다. 공장 완공식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만큼, 러시아 현지에서도 큰 기대를 받았다. 연산 23만대 생산 규모를 갖추고 현지 전략형 차종인 쏠라리스와 크레타 등을 만들어 러시아 등 동유럽 국가에 판매해왔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2021년 23만4000대의 차량을 생산하며 월 단위 시장 점유율에서 1위에 오르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한 부품 공급난과 루블화 가치 하락에 따라 손실이 누적됐다. 러시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평판 하락까지 감수해야 했다.
러시아를 떠나는 완성차 업체는 현대차뿐 아니다. 다른 글로벌 업체들은 일찌감치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프랑스 르노는 지난해 5월 모스크바 공장을 모스크바시에 1루블에 넘겼고, 현지 합작사 지분은 러시아 국영자동차개발연구소(NAMI)에 1루블에 팔았다. 일본 닛산도 지난해 10월 러시아 공장과 자회사 지분을 NAMI에 1유로(약 1420원)에 넘기고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도요타와 벤츠, 포드, 폴크스바겐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현대차 관계자는 “러시아 공장의 다양한 처리 방안을 검토했고, 이에 따라 최적의 매각 방식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 공장도 매각, 글로벌 전략 변화
현대차는 전기차 전환과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글로벌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공장 매각 등을 통한 규모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한때 연 254만대를 생산하는 현대차의 최대 생산 기지로 베이징에 3곳, 창저우, 충징 등 5개 공장이 운영됐다.
그러나 2021년 베이징 공장 한 곳을 매각했고, 최근엔 충칭 공장을 매물로 내놨다. 2017년 1조원이 넘는 투자를 통해 완공한 연산 30만대 공장이지만, 중국 판매량 부진으로 2021년부터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현대차는 또 창저우 공장도 매각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아세안 국가를 새로운 생산 기지로 점찍었다. 현대차는 지난 8월 GM 인도 법인이 보유하고 있던 연 13만대 규모 자동차 공장을 인수했다. 2025년 이후 이 공장이 본격 가동하면 현대차·기아는 인도에서만 약 140만대를 생산하게 된다. 한국을 제외하면 해외 최대 규모 생산 기지다. 과거 중국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는 셈이다. 태국에도 기아가 25만대 생산 규모의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이다. 싱가포르엔 지난달 연 3만대를 생산하며 새로운 생산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를 준공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내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에도 30만대 생산 규모의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고 있다. 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미·중 갈등에 따라 러시아, 중국에서 불확실성이 증대하며 현대차의 생산 기지 이전과 전략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