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콘 전기차 공장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의 한국 지사인 르노코리아차는 2025년부터 스웨덴 업체 폴스타의 전기 SUV를 생산할 계획이다. 최근 르노와 폴스타는 차량 제작 설비 설치와 기술 인력 파견 등 구체적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글로벌 5위 자동차 업체 르노가 자사 공장에서 제3의 브랜드를 ‘위탁 생산’하기로 한 결정은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큰 이슈가 됐다. 자기 브랜드 차량을 생산하는 것보다 남의 브랜드를 만드는 게 수익에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르노 측은 “폴스타 생산을 성공적으로 해내면 또 다른 해외 업체의 일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추가 수주 가능성도 열어놨다.

자동차 업계의 제조 문법이 바뀌고 있다. 르노처럼 다른 브랜드 차량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아예 차량 생산만 맡겠다는 회사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설계’와 ‘생산’이 분리된 것처럼 자동차 제조 분야에서도 ‘파운드리(위탁 생산)’ 개념이 본격 등장한 것이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대만 TSMC 같은 초대형 파운드리 업체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변화는 내연기관차보다 상대적으로 제조가 쉬운 전기차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자동차 업계에도 파운드리 태동

산업계의 대표적 분업 모델은 반도체 분야다. 설계 전문 기업인 ‘팹리스’,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 패키징 등을 맡는 ‘후공정(OSAT)’ 등으로 구분된다. 대규모 투자가 계속 이뤄져야 하는 설계와 달리 생산과 후공정은 비교적 공정이 간단하고, 비용을 줄이는 것이 핵심으로 대만·한국·중국 업체들이 강세를 보인다.

자동차 산업에 이런 분업이 적었던 이유는 3만여 개 부품이 들어가는 내연기관차 제조 특성상 차량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가 소수였기 때문이다. 리콜과 같은 안전 이슈 등 제조 후 관리 어려움도 진입 장벽을 높였다.

그러나 전기차 전환이 본격화하면서 판이 바뀌었다. 전기차는 복잡한 구조의 엔진 대신 모터가 탑재되는 등 내연기관차와 비교해 부품이 40%가량 적어 제조의 까다로움이 줄었다. ‘바퀴 달린 컴퓨터’라고 불릴 만큼 차량 자체보다 탑재된 반도체 칩이 중요해졌고, 이를 통해 무선 업데이트(OTA)가 보편화하며 대규모 리콜 등에 대한 대응도 가능해졌다.

애플 아이폰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위탁 생산 업체 대만 폭스콘이 전기차 제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 상징적인 변화다. 폭스콘은 지난해 11월 전기차 자회사 ‘폭스트론’을 대만 증시에 상장했다. 폭스트론 이름으로는 차량을 만들지 않고, 제3 브랜드 일감을 위탁 생산하는 게 이들의 전략이다. 류양웨이 폭스콘 회장은 지난해 BBC 등과 한 인터뷰에서 “전기차는 바퀴 달린 아이폰과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분야”라며 생산을 자신했다.

재규어, 벤츠 일부 차량을 위탁 생산하는 마그나 슈타이어, 발메트 오토모티브 등도 최근 분위기를 기회로 보고 있다. 내연기관차를 위탁 생산하던 때엔 연 20만대 수준에 그쳤지만, 전기차 시대엔 100만대 이상의 일감을 받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마그나는 지난해 미국 공장에 5억달러(약 6500억원)를 들여 설비를 재정비했다.

그래픽=김성규

◇빅테크, 스타트업 도우미 역할

전기차 위탁 생산이 본격화하면 자동차 업계 지형이 크게 요동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전기차 사업 진출을 저울질하던 빅 테크 기업들이 위탁 생산 업체를 아군 삼아 대거 이 분야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완성차 업체와 합작사를 차리는 지금의 방식보다 이득도 크고 간편한 선택지다. 제2의 테슬라로 불리다 ‘양산의 벽’에 가로막혀 폐업 위기에 놓인 수십 개의 전기차 스타트업도 또 다른 기회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전기차 제조 역시 대규모 공장 건설을 위한 자본과 노동력, 전기차 플랫폼 제조 기술 등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위탁 생산 업체들이 기존 자동차 제조사보다 우위를 확보하기가 만만찮다는 의견도 나온다.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전기차 관련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거세지고, 다른 제조보다 공급망이 복잡한 것도 부담이다. 이호중 한국자동차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폭스콘 등이 양산에 능숙하다 해도 전기차 생산 규모는 미미해 핵심인 제조원가 우위를 확보하는 데 진통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