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차 업계에선 연식 변경을 앞둔 연말에 재고 처리를 위해 자동차 가격을 크게 할인하는 게 보통이다. 근데 올해 상황은 다르다. 수입차 판매 1·2위를 다투는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가 이례적으로 5월에도 최대 20% 넘게 할인해 팔고 있다. 다른 수입차 업체들도 전기차 위주로 큰 폭의 할인에 나섰다.
이처럼 ‘때아닌’ 할인 경쟁이 벌어지는 건 수입차 업계에 닥친 불황 탓이다. 업계에선 “올해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며, 연말 할인만으로는 재고 처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한다. 고금리와 고물가로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며, 올 1~4월 수입 승용차 판매량은 7만6143 대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7.8% 줄었다. 2019년(7만380대) 이후 가장 저조한 실적이다.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 영향이 초고가 수입차 소비부터 얼어붙게 했고, 올 들어 8000만원 이상 법인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달게 한 영향도 있다.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1분기 8000만원 초과 수입 법인차 등록(8168대)은 작년 1분기보다 23.8% 줄었다. 같은 기간 이 가격대 국산 법인차 등록(2700대)은 10.4% 감소하는 데 그쳤다.
◇초고가 전기차부터 처리하라
22일 자동차 구매 정보 플랫폼 겟차에 따르면, 이달 기준 자동차를 최대 20% 이상 할인하는 수입차 모델은 23종이다. 작년 5월에는 아우디의 대표 세단 A6가 24.5% 할인율로 유일하게 20% 넘게 할인하는 모델이었다. 10~20% 할인 차종도 작년 5월 306개에서 이달엔 354개로 늘었다.
수시로 가격을 할인하는 브랜드도 있지만, 늘 수입차 판매 1·2위를 다투는 BMW와 메르세데스-벤츠가 연말 아닌 때 높은 할인율로 판매하는 건 이례적이다. 가격이 3억7500만원부터 시작하는 벤츠 최상위 브랜드인 마이바흐 S 클래스(680 4MATIC 기준)는 25% 낮춰 팔고 있다. 전 차종 중에 가장 높은 할인율이다. 벤츠 최고급 모델인 S 클래스(580e 4MATIC 기준)도 16.9% 할인된다. BMW의 중형 SUV X3M(컴페티션 기준)도 22.7%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이 모델은 2023년식으로, 2024년식 연식 변경 모델이 새로 출시된 영향도 있지만 이례적으로 높은 할인율이다.
20% 이상 파격 할인되는 모델은 대부분 초고가 전기차다. 전기차 중에 가장 많이 할인되는 차량은 벤츠의 준대형 전기 세단 EQE(350 + 기준)다. 차량 가격이 1억350만원부터 시작하는데, 24.9%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벤츠의 전기 대형차인 EQS SUV는 트림(세부 모델)별로 20% 안팎 할인율이 적용된다. 아우디의 준대형 전기 SUV e-트론도 20%씩 할인되고 있다.
◇일본차, 볼보는 기존 가격 그대로
수입차 업계에서는 지금의 불황기가 업체 간 옥석을 가리는 시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비정기 가격 할인이 당장 재고 소진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가격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불황의 영향을 덜 받은 업체들은 여전히 할인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올 1~4월 국내 판매량이 13% 늘어난 일본 수입차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렉서스는 준대형 세단 ES(3%)가 가장 많이 할인되는 모델이며, 도요타는 중형 세단 캠리(1.8%) 할인율이 가장 높다. 두 업체 모두 0~1%대 할인이 대부분이다. 스웨덴 업체 볼보도 모든 모델을 사실상 기존 가격을 그대로 받고 있다. 볼보 역시 지난 4월 판매량이 작년 4월보다 27% 늘어나는 등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대신 이 업체들은 최근 서비스센터, 교육 시설 등을 늘리며 판매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할인 경쟁이 수입차 유통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급격한 할인이 딜러사 등의 재정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수입차 업체 관계자는 “딜러사들이 할인을 통해 재고 보유 기간의 부담을 줄이고 있지만, 지금처럼 마진을 깎는 식의 할인은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