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경기 화성 남양연구소의 현대·제네시스 디자인센터. 현대차와 제네시스의 차 내·외부 디자인을 총괄하는 곳이다. 이날 이 건물에서도 가장 보안이 삼엄한 곳에 들어갔다. 1층 디자인 실내 품평장이다. 매달 한 번 여기서 정의선 회장 등 그룹 수뇌부가 차세대 제품 디자인을 직접 눈으로 보고 평가한다. 의자나 테이블 하나 없는 약 400평 크기의 공간에 신차 후보 3~4대를 세워 놓고 자리에 선 채 길게는 3시간씩 토론한다.
이곳에서 이날 현대차그룹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 겸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인 루크 동커볼케 사장을 만났다. 그는 “예전엔 디자인이 기술에 맞춰 보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젠 애플이 그랬듯, 디자인이 엔지니어링과 기술의 혁신을 이끌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했다.
루크 동커볼케 사장은 폴크스바겐그룹에서 22년 일한 세계 최고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하나다. 특히 세계 최고급 브랜드로 꼽히는 벤틀리에서 햇수로 4년, 람보르기니에서 7년 일했다. 2015년 말 정의선 당시 부회장의 설득으로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현대차그룹과 동커볼케 사장은 실내 품평장을 포함해 그룹의 자동차 디자인 작업 절차와 철학 등을 세세하게 공개하며 설명했다. 신차 디자인 같은 기밀은 꼭꼭 숨겼지만, ‘디자인 경영’이 단순히 자동차의 내·외관을 넘어 자동차 제작이나 그룹의 의사 결정 방식 등을 변화시켰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애플이 그랬다. 과거에는 엔지니어가 컴퓨터를 설계하면 거기에 맞춰 디자인했다. 하지만 CEO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아이폰 등을 디자인한 조너선 아이브를 만난 후 문화가 달라졌다. 혁신적인 디자인이 엔지니어를 이끌어간 것이다. 정 회장은 요즘도 이 사례를 언급하며 “디자인으로 비전을 던져 주길 바란다”고 말한다.
◇헌신적이고 숙련된 인력, 빠른 속도가 경쟁력
외부에서 영입된 동커볼케 사장은 현대차그룹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현대차그룹 경쟁력 중 첫째로 빠른 의사 결정을 꼽았다. 직원들이 일에 대해 진지하고 헌신적이며, 숙련돼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동커볼케 사장은 “유럽 등에서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이해관계자들이 너무 많이 설명을 요구해 오히려 실행을 제때 하는 일이 적다”면서 “현대차그룹에 와서 경험한 한국인들의 실행력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라고 했다. 정주영 선대회장 시절부터 이어온 이른바 “해봤어?”의 문화가 그룹 내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창의성이 중요한 디자인 영역에서 때론 이런 문화는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동커볼케 사장은 “내가 처음 스카우트돼 디자인센터에 오니 늘 윗사람의 명령을 기다리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군대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먼저 자기 개인 사무실을 없애고 다른 디자이너들과 한 공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장도, 상무도 없는 모두 같은 디자이너다. 언제든 ‘이런 아이디어는 어떤가요?’라고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8개월 동안 4단계, 단계마다 200명의 치열한 토론
수평적인 분위기 속에서 수년간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받은 디자인이 속속 나왔다. 현대차그룹의 디자인은 크게 4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신차 한 대를 만들기로 하면 한국·미국·유럽 등에 있는 디자인센터 소속 디자이너들이 경쟁작을 제출한다. 디자인센터 임원들이 자동차 외장 디자인 4~5종, 내장 디자인 3~4종을 최종적으로 추리면 그때부터 최대 18개월간 4단계에 걸쳐 내·외장 디자인 최종 후보 1개씩을 남기기 위한 심사가 시작된다.
단계마다 우선 R&D, 생산, 판매, 마케팅 등 다양한 부서의 실무진 총 200명 안팎이 새 디자인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각 부서의 의견을 제출한다. 그리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정의선 회장 등 그룹 최고위 임원 20여 명이 참여해 결론을 내린다. 이걸 네 번 안팎 반복하는 것이다.
동커볼케 사장이 가장 애착을 가진 현대차그룹의 차는 ‘아이오닉 5′. 1975년 한국 고유 기술로 만든 첫 국산차 포니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차다. 치열한 내부 평가를 거친 이 차는 2021년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IDEA 디자인 어워드 금상, 2021 굿디자인 어워드 등을 휩쓸며, 호평을 받았다. 그는 “포니는 현대차에도 중요하지만, 한국 모빌리티의 시작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며 “이런 지난 50년의 역사를 돌아봐야 앞으로의 50년을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도해 디자인한 제네시스 최고급 세단 G90도 IDEA 디자인 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상 등을 수상했다. 동커볼케 사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젊은 세대들 다수는 한국을 알고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하지만, 그 윗세대에는 아직 한국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면서 “현대차그룹이 더 다양한 세대와 문화를 포용해 한국을 더 많이 알리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