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궁이 파리올림픽 전 종목에서 금메달 5개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후, 20년째 양궁을 묵묵히 지원해 온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기업에선 정 회장의 ‘양궁 경영’을 실제 회사 경영에도 접목할 수 있단 관점에서 공부하고, 일반 시민들도 일상에서 적용 가능한 리더십의 표본으로 정 회장의 발언에 주목하고 있다.
이차전지 소재 기업 에코프로는 18일 사내 홍보채널인 ‘에코톡톡’에서 한국 양궁의 성공 비결을 소개하며 “기업 경영에서도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리스크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정의선 회장의 ‘권한 위임을 통한 서번트 리더십’을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참고해야 한다고 했다. 서번트 리더십이란 리더가 군림하거나 관리하는 대신 구성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방식의 리더십을 뜻한다. 또, 정 회장의 양궁과 관련된 발언도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작년 ‘한국 양궁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공정하게 경쟁했는데,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괜찮다”라고 발언한 영상들은 19일 기준 유튜브 조회수 약 95만회, 314만회를 기록했다.
19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업계에선 정의선 회장의 양궁 리더십을 크게 3가지로 본다. 장기적 관점에서 공정한 운영 체계를 만들되 작은 위험은 감수하는 ‘대담성’, 최신 기술 등을 적용해 변화에 대비하는 ‘혁신성’, 그리고 선수들과 소통하는 ‘포용성’이다.
올해 파리올림픽에선 지난 올림픽에서 보지 못했던 ‘새 얼굴’들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대한양궁협회의 공정성이 다시금 화제가 됐다. 그 배경으로 정 회장의 ‘대담성’이 꼽힌다. 정 회장은 2005년 대한양궁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기반을 다진 공정하고 투명한 협회 운영 원칙을 이어 받았다. 대한양궁협회는 지연, 학연 등에 의해 선발하는 관행이 없고, 국가대표를 선발할 때도 이전의 성적은 배제한 채 철저하게 현재의 성적만 반영한다.
정 회장은 특히 우수 선수를 육성하는 체계를 강화했다. 2013년 유소년 대표 선수단(초등부)을 신설해 장비와 훈련을 지원했다. 인재들을 어린 나이부터 육성하기 위한 것으로, 유소년부터 국가대표에 이르는 일련의 선수 육성 시스템을 체계화했다. 파리올림픽 양궁 3관왕인 김우진 선수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실업팀까지 모든 선수들이 운동 계속하며 나아갈 수 있는 체계가 확실히 잡혀 있다”고 했다.
또,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 경영에서 보여준 ‘미리미리’식 경영이 각종 기술을 도입하는 혁신으로 이어졌다는 평이다. 현대차그룹의 R&D(연구개발) 기술을 적용한 연습 지원이 한 예시다. 정 회장은 2012년 런던올림픽이 끝난 직후,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R&D 기술을 선수들 훈련과 장비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지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열린 리우올림픽부터 현대차그룹은 한국 양궁에 기술 지원을 하게 됐고, 이번 올림픽 훈련에도 슈팅로봇을 비롯한 첨단 기기가 적용됐다.
실전보다 더 혹독한 훈련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됐다. 각 대회별로 경기 방식, 개최국의 환경 조건을 미리 분석하고 예측해 준비해 왔다.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섬나라의 거센 바람에 대비할 수 있도록 국가대표 선발전을 남해에서 열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 때는 결승이 펼쳐지는 일몰 시간대의 현지 양궁장 상황을 최대한 반영, 관중이 가득 찬 야구장에서 라이트를 켜고 실전 연습을 했다. 이번 파리 올림픽 때도 센강의 거센 강바람을 미리 경험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훈련을 했다.
여기에 소통에 기반한 포용력이 더해져 시너지를 냈다. 정 회장은 2005년 양궁협회장 취임 이후 주요 국제 양궁대회 현장을 찾아 선수들을 격려해 왔다. 평소에도 선수들을 편하게 만나 밥을 먹고, 선물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파리올림픽에서 남자 단체전 상대가 개최국 프랑스로 정해지자, 긴장한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홈팀이 결승전 상대인데 상대팀 응원이 많은 건 당연하지 않나. 주눅들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자. 우리 선수들 실력이 더 뛰어나니 집중력만 유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