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왼쪽) 현대차그룹 회장이 2021년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현대차 고성능 브랜드 N을 홍보하며 포즈를 취한 모습. 오른쪽 사진은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이 2009년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24시 내구레이스’에 레이서로 나선 모습. 두 사람이 이달 말 처음으로 모터스포츠 협업을 위해 만난다. 현대차와 도요타는 과거 ‘숙적’ 관계였지만, 최근 미래차 시대를 맞아 협력 필요성이 커졌다. /현대차그룹·도요타
정의선(왼쪽) 현대차그룹 회장이 2021년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현대차 고성능 브랜드 N을 홍보하며 포즈를 취한 모습. 오른쪽 사진은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이 2009년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24시 내구레이스’에 레이서로 나선 모습. 두 사람이 이달 말 처음으로 모터스포츠 협업을 위해 만난다. 현대차와 도요타는 과거 ‘숙적’ 관계였지만, 최근 미래차 시대를 맞아 협력 필요성이 커졌다. /현대차그룹·도요타

정의선(54) 현대차그룹 회장과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68) 도요타그룹 회장이 이달 말 양사가 국내에서 공동 개최하는 모터스포츠 행사에서 만난다. 한국과 일본의 대표 완성차 기업 수장들이 공개 석상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두 회사가 어깨를 견주게 됐음을 사실상 인정하게 된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도요타는 현대차에겐 넘기 힘든 산이었다. 현대차는 세계 최초로 하이브리드차를 양산한 도요타를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글로벌 시장에서 도요타가 2007년 첫 판매 1위를 기록할 때만 해도 현대차그룹은 6위였다. 지금 상황은 다르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글로벌 3위에 진입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전기차 분야에서는 도요타를 오히려 앞서가고 있다. 미래차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가운데, 오랜 기간 경쟁 관계였던 두 회사가 상대적으로 협력하기 쉬운 ‘모터스포츠’ 분야부터 교류하며 협력에 물꼬를 트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과 도요타코리아는 오는 27일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현대 N x 도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8일 밝혔다. 두 회사 간 첫 협업. ‘현대 N’과 ‘도요타 가주 레이싱’은 국제 모터스포츠 대회인 WRC에 참여하는 양사의 팀 이름이다. 고성능 자동차와 경주차 등을 선보이고 일반 시민들이 그 성능을 체험할 수 있는 행사다. 정 회장과 아키오 회장은 행사장을 방문,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도 차에 대한 각자의 열정을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두 회장 모두 유명한 자동차 마니아다. 아키오 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모리조(MORIZO)’라는 가명으로 직접 레이싱 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6월에도 일본 후지스피드웨이에서 24시간을 달리는 ‘내구 레이스’에 레이서로 참여했다. 정 회장도 20대 즈음 입문용 자동차 경주로 불리는 ‘짐카나 레이스’를 즐겼고, 지금도 시간만 나면 차를 몰고 나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 두 회장은 창업주의 손자로, 각각 경영자로서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키오 회장은 지금의 도요타를 창업한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의 손자다. 도요타가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경영 적자에 시달리던 2009년 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찾았던 2012년 초만 해도 도요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장에 취임하던 해 미국에서 있었던 대규모 리콜 사태의 후유증이 컸고, 2011년 3월에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그는 방한 당시 “도요타는 (차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하는 시기를 오랫동안 경험했다”며 “대반격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전 세계 고객에게 성심성의껏 제품을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했었다. 2011년 글로벌 3위로 주저앉았지만, 대대적 조직 개편과 품질 강화로 2012년 말 다시 1위를 탈환했다.

정주영 선대 회장의 손자인 정 회장은 2005년 기아자동차 사장에 취임하며 경영 일선에 참여, ‘디자인 혁신’으로 실적 부진에 빠진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던 2009년에는 현대차 부회장을 맡아, 미국에서 ‘1년 내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파격 보증 프로그램’을 성공시켰다. 그 덕분에 이듬해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5위에 진입했고, 2022년에는 3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차 분야에서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가운데, 두 회장의 첫 만남을 계기로 교류에 물꼬가 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장기화되고 중국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계속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이 미래차 분야에서 서로의 우군이 될 수 있단 것이다. 두 회사는 수소를 미래차의 중요한 축으로 본다는 점에서도 유대감이 있다.

도요타는 하이브리드 자동차 판매를 앞세워 글로벌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전기차 전환에는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도요타는 이달 초에도 북미 전기차 공장 생산 시작 시기를 기존 내년에서 2026년으로 연기했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중 하나인 미국에서 전기차 2위를 기록하는 등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