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시장에서 검은색이 달라졌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새로운 검은색을 개발하고 대표 차량이나 한정판 차량에 ‘올블랙’을 앞세우고 있다. 기존의 검은색으로는 다른 차량과 차별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년 전만 해도 검은색은 ‘그랜저’ 같은 고급 세단을 상징하는 색이었고, 그 이하 차급은 흰색·은색 등 무채색을 택하는 게 마치 공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점점 전 연령대에서 세단보다 활동성이 두드러지는 SUV가 인기를 얻으며 유채색이 약진한 데다, 고급차 시장에서도 다채로운 색이 쏟아지면서 검은색의 자리가 위협받게 되자 대응에 나선 것이다.
현대차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가 올 들어 선보인 ‘블랙 모델’은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검은색으로 마감한 차량이다. 라디에이터 그릴(흡기구), 전면 엠블럼과 내장재는 물론 볼트·스위치 등 거의 모든 부품을 검은색으로 칠했다.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농도의 검은색을 사용했다. 먹의 농담 차이로 원근감을 보여주는 동양화에서 착안한 것이다. 지난 3월 ‘G90′에 이어 이달 중순 ‘GV80′과 ‘GV80 쿠페’도 이 모델로 출시했다.
업계에선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자동차 구매 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선호가 확실한 검은색 차를 통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한다”는 지적이다. 매년 글로벌 자동차 색상 점유율을 조사하는 화학 기업 바스프(BASF)에 따르면, 작년 자동차 외장 색상에서 검은색 점유율(21%)은 2021년 대비 4%포인트 올랐다. 인기 색상 ‘톱3′(흰색·검은색·회색) 중 나머지 색들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세대 아우르는 ‘특별한 검정색’
최근 각 브랜드가 새로 출시한 검은색 차량은 기존 브랜드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과감히 바꾼 게 특징이다. 무난함에 중심을 뒀던 기존 방식을 넘어, 오직 검은색에 최적화된 차량이 잇따른다. 내수 침체에도 비교적 구매 감소 폭이 덜한 3040을 겨냥한 것이란 분석이다. 올 1~3분기 국내 자동차 판매는 작년 동기 대비 10% 안팎 감소한 가운데, 30대(-4.9%)와 40대(-8.8%)는 소폭 감소하는 데에 그쳤다. 또 최근 SUV의 약진으로 유채색이 늘어나는 추세였는데, 이에 익숙하지 않은 5060을 겨냥해 기존과 차별화된 검은색을 내놨다는 분석도 나온다.
볼보코리아가 지난 15일 97대 한정으로 선보인 ‘XC40 블랙 에디션’ 외관은 ‘오닉스 블랙’으로 칠해졌다. 외부 빛이 반사돼 보석처럼 빛나는 게 특징이다. 은색이 섞인 기존 마크를 검게 칠했고, 브랜드 고유의 크리스털 기어봉을 가죽 소재로 바꿨다. 독일 BMW가 ‘가장 어두운 검은색’이라 불리는 ‘반타 블랙’을 적용해 콘셉트카 ‘X6′를 개발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BMW는 이 색상이 빛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 레이저 기반의 센서 장비나 자율 주행 기술 부품 등을 개발하는 데도 사용하겠다는 계획이다.
검은색 차량들은 선호 연령대가 비교적 낮다. ‘회장님 차’로 불리는 G90은 40대 구매 비율이 9%인 반면, G90 블랙 모델은 두 배인 17%에 달한다. 2030 구매 비율도 각각 3%, 6% 안팎으로 차이가 난다. 지난 4월 한정 판매된 볼보 ‘XC40 다크 에디션’은 구매자 중 여성이 75% 안팎, 30대 구매 비율도 50% 안팎에 이른다. 일반 XC40의 남녀 구매 비율이 비슷하고 30대 구매율이 30% 수준인 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볼보 관계자는 “나만의 차량을 소유하고 싶은 젊은 고객층의 반응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했다.
◇검은색 선호, 세단 넘어 SUV로
새 검은색으로 출시되는 차량 중에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SUV도 많다. 제네시스의 판매량을 견인하는 대표 차량 GV80도 이달 블랙 모델이 나왔다.
혼다코리아도 지난달 대표 SUV 모델인 파일럿의 ‘블랙 에디션’을 출시했다. 파일럿은 전장(5090㎜)과 전폭(1995㎜)이 동급의 팰리세이드보다 20㎜ 이상 커, 강인한 느낌을 지닌 차량이다. 여기에 전면 그릴, 휠, 엠블럼 등 차량 대부분을 블랙으로 칠하면서 기존의 커다란 차체를 더욱 강조하게 됐다. KG모빌리티도 플래그십 차량인 대형 SUV 렉스턴의 최상위 트림(세부 모델)으로 올블랙 계열의 ‘더 블랙’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