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에서 사상 첫 외국인 CEO(최고경영자)가 탄생했다. 국내 핵심 기업 CEO에 외국인이 선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전문경영인 부회장도 부활했다. 또 트럼프 정부 1기에서 주인도네시아 대사 등을 역임한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을 이날 사장으로 영입해 임명했다. 트럼프 2기가 출범하며 보조금 폐지와 보편 관세 시행 등 트럼피즘(트럼프주의)의 확산으로 글로벌 자동차 업계가 격랑에 휩싸인 가운데 선제적으로 대응력을 높이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은 15일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을 현대차그룹 부회장으로 승진, 임명하고, 현대차 대표이사에 호세 무뇨스 COO(최고운영책임자) 겸 미주대권역장을 내년 1월 1일부로 선임하는 내용을 포함한 ‘2024년 대표이사·사장단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신임 장재훈 부회장은 완성차 담당 부회장으로서 상품기획부터 구매·품질·제조 등 완성차 분야 밸류체인 전반을 총괄한다. 무뇨스 CEO는 현대차를 총괄하면서 국내 시장은 물론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시장 확대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회사 설립 후 첫 외국인 CEO 선임은 전체 판매 대수에서 해외 비율이 80%를 웃돌고, 미국 시장 비율만 5분의 1이 넘는 현대차의 현실을 반영한 결정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올 1~10월 기준 현대차는 전체 판매량 344만7000여 대 중 해외에서 286만6000여 대를 팔았다. 미국 판매량만 74만대를 웃돌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외국인 CEO 선임은 신선한 시도로 다른 기업들도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출범을 앞둔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 속에서 혁신과 개방을 강조한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장재훈 신임 부회장부터 호세 무뇨스 CEO, 성 김 사장 등 주요 경영진이 현대차 공채 출신이 아닌 외부 출신으로 채워진 데다 이번 인사에선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두 단계를 뛰어 대표이사에 발탁 승진한 사례도 나왔다. 대외 환경이 급변하는 시기를 맞아 새로운 분위기를 확산하고,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대비에 무게를 담았다는 평가다.
◇첫 외국인 CEO…미국 외교관 출신 사장
1967년 현대차 설립 이후 57년 만에 이뤄진 첫 외국인 CEO 선임과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의 사장 임명은 트럼프 2기 출범에 맞춘 현대차그룹의 발 빠른 대응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당선인이 IRA(인플레이션감축법)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폐지와 모든 제품에 대한 10~20% 보편 관세 부과 등 바이든 정부와 크게 달라진 무역·통상 정책을 예고하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선제적인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이날 무뇨스 사장은 CEO 선임 직후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현대차그룹은 2021년 이후 메타플랜트(HMGMA)와 전기차 배터리 공장 두 곳을 포함해 미국에 158억달러(약 22조원) 이상을 투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스페인 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자인 무뇨스 사장은 스페인 IE비즈니스스쿨 MBA를 거쳐 마드리드 폴리테크닉대에서 원자핵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PSA(푸조·시트로엥), 도요타 유럽 등을 거쳤으며, 대우자동차 이베리아 법인에 근무하며 우리나라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닛산에서 CPO(전사성과담당) 겸 중국법인장, 북미법인장 등으로 15년을 지내고, 2019년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GCOO) 및 미주권역담당으로 현대차에 합류했다. 현대차가 사드 사태와 중국 현지 업체들의 약진 속에 중국 내 입지가 급격히 감소하며 위기를 맞은 가운데 무뇨스 사장이 맡은 북미 시장은 최대 실적을 잇달아 경신하면서 효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같은 성과 덕에 2022년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올랐고, 그해 현대차·기아는 일본 도요타와 독일 폴크스바겐에 이어 글로벌 3위에 처음으로 올랐다. 무뇨스 사장이 합류하기 전인 2018년 67만7946대였던 현대차 미국 판매량은 지난해엔 5년 만에 28.4% 늘어난 87만370대까지 확대됐다.
부시 행정부부터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핵심 요직을 맡아온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의 사장 영입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를 둘러싼 시계 제로 상황을 반영한 선택으로 꼽힌다. 10대 시절 미국에 이민 간 성 김 대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에서 대사를 역임하고, 미 국무부에서 대북정책특별대표로도 활동한 최고위급 외교관 출신이다. 특히 트럼프 1기 당시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대사를 지냈으며, 미국 외교관으로선 최고위직인 경력대사 칭호를 받았다. 2018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미국 측 실무회담 대표단을 이끌기도 했다.
올 초부터 고문역으로 현대차에 합류한 데 이어 사장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미국 트럼프 2기 신(新)정부와 교류·협력에 큰 역할이 기대된다. 성 김 사장은 글로벌 대외협력, 국내외 정책 동향 분석 및 연구, 홍보 등을 총괄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호세 무뇨스 사장은 성과·능력주의와 글로벌 최고 인재 등용이라는 인사 기조에 따라 창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 CEO에 내정됐다”며 “성 김 사장은 그룹 싱크탱크 수장으로서 대외 네트워킹 역량 강화에 주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적 쇄신, 경쟁력 강화”
기아의 역대 최대 실적 달성을 견인한 최준영 기아 국내생산담당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한다. KIA 타이거즈 대표도 겸직하며 올해 KBO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규복 현대글로비스 대표이사 부사장도 사장으로 승진하며, 현대트랜시스에선 백철승 부사장이 대표에 내정됐다. 오준동 기아 상무는 두 단계 위인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현대케피코 대표에 오른다.
현대건설에선 이한우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대표이사에 오르고,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에는 주우정 기아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며 내정됐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번 임원인사는 역량·성과를 중심으로 글로벌 차원의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인사”라며 “대표이사·사장단 인사에 이어 12월 중순에 있을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성과 중심의 과감한 인적 쇄신뿐 아니라 중장기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제적 육성 및 발탁 등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