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기차의 공습에 전통의 자동차 강자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있다. 세계 2위 폴크스바겐이 안방인 독일에서 공장 3곳 폐쇄를 추진 중인 가운데 일본 3대 자동차 업체인 닛산, 미국 빅3로 불리던 포드도 구조 조정 대열에 가세했다.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 업체인 독일 보쉬도 감원 규모를 늘렸다. 다가올 전기차 시대에 ‘유럽 배터리의 희망’으로 기대를 모았던 스웨덴 노스볼트는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가 거센 유럽과 동남아, 남미 등에서 과거 영향력이 컸던 유럽과 일본 업체들이 가장 먼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남아서 밀리는 일본, 안방 내주는 유럽

24일 일본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닛산은 태국에서 운영 중인 2개 공장 중 규모가 큰 1공장의 생산을 일부 중단하고, 직원 약 1000명을 내년 가을까지 해고하거나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초 닛산이 2027년 3월까지 전체 인력의 7%에 달하는 9000명을 줄이겠다고 밝힌 가운데 동남아 최대 생산기지인 태국에서 구조 조정에 나선 것이다. 닛산의 태국 1공장과 2공장의 생산 능력은 합쳐서 연 37만대에 달하지만 2023년 닛산의 태국 내 판매량은 전년 대비 30% 가까이 급감한 1만4244대에 그쳤다. 앞서 일본 스즈키는 태국 공장을 내년 말까지 폐쇄하기로 했고, 혼다도 태국 아유타야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하나로 통합하기로 했다.

그래픽=송윤혜

최근 태국·인도네시아 등 각국 정부가 전기차 친화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전기차 전환에 뒤처진 일본 업체들의 동남아 시장 내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동남아 최대 시장인 태국에서 90%를 웃돌던 도요타, 혼다 등 일본 브랜드 점유율은 지난해 78%로 뚝 떨어졌다.

같은 날 세계 1위 자동차 부품 기업인 독일 보쉬도 2032년까지 독일 3800명을 포함해 종업원 5550명을 추가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올 초 발표한 7000명을 더해 1만명 넘게 구조 조정에 나서는 것이다. 앞서 독일 변속기 업체 셰플러도 이달 초 4700명 감원을 발표했다. 미국 포드도 유럽 인력 4000명을 감축하겠다고 지난 20일 밝혔다. 올 들어 9월까지 유럽에서 포드 자동차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17.9% 감소하자 독일 2900명, 영국 800명 등 유럽 전체 인력의 14%를 줄이는 것이다. 독일 BMW, 폴크스바겐 등이 투자하며 유럽 전기차의 ‘희망’으로 불렸던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마저도 납기와 품질 등 각종 문제를 낳으며 지난 21일 미국에서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중국차 공습에 속수무책

전기차를 앞세운 중국이 시장을 확대하면서 주요 타깃이 되는 시장들의 터줏대감들부터 하나둘씩 주저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 시장에서 호조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호령한 폴크스바겐이 중국에서 밀리고, 뒤늦은 전기차 투자로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과 같은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에 따르면 2020년 유럽 순수 전기차(BEV) 시장에서 2%에 그쳤던 중국 브랜드 비율은 지난해 7.6%에 이어 올해는 12%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시장에서 ‘메이드인 중국’ 전기차의 비율은 같은 기간 2.9%에서 25%로 크게 늘어난다.

일본이 밀리는 태국 시장에서 중국은 지난해 점유율을 11%까지 늘렸고, 전기차 부문에선 점유율 80%를 나타냈다. 전기차를 필두로 한 중국 자동차의 공습에 강소 부품 기업들의 경쟁력이 강한 독일마저도 전기차 전환으로 2035년까지 일자리 최대 19만개가 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사실상 한국과 미국을 제외하면 중국 전기차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중국 전기차에는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비야디(BYD) 등 중국 자동차 업체들은 순항 중이다. BYD는 지난 3분기 매출이 작년보다 24% 증가한 282억달러(약 39조6000억원)를 기록하며 테슬라(252억달러)를 앞섰고, 샤오미는 첫 전기차 SU7이 이달 들어 출시 230일 만에 10만대 생산을 돌파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중국이 자동차 수출에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에서 기존 업체들로서는 구조 조정을 늦출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