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위와 3위 자동차 업체인 혼다와 닛산의 합병이 논의되고 있다. 합병이 실현되면 현대차그룹을 제치고 연간 740만대 안팎을 판매하는 글로벌 3위 자동차 그룹이 탄생한다. 18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혼다와 닛산은 최근 기업 결합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 지주회사를 설립해 각 브랜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이를 위해 조만간 양해각서를 체결할 예정이다. 당장은 두 회사의 합병이지만, 닛산이 최대 주주인 미쓰비시자동차도 새롭게 탄생하는 자동차 그룹에 합류할 전망이다. 미쓰비시자동차까지 합쳐지면 연산 800만대가 넘는다.
이날 보도가 나온 뒤 미베 도시히로 혼다 사장은 두 회사의 합병 논의를 사실상 시인했다. 일본 현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면에서 볼 때 (양사 합병)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혼다와 닛산 모두 합병과 관련해 “다방면에서 검토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단일 기업으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혼다와 닛산은 중국에서의 판매 급감, 전기차 전환 지연, 안방인 동남아 시장에서 밀려나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합병을 논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회사는 1990년대 ‘기술의 혼다’ ‘기술의 닛산’으로 불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닛산은 스페인과 멕시코 등 해외 사업에서 파산 위험에 직면해 1999년 프랑스 르노에 위탁 경영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닛산은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을 영입하며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최근에는 독자 기술 개발이 늦어지며 글로벌 시장에서 밀려났다.
양사가 합병하면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과 푸조시트로앵그룹 합병으로 스텔란티스가 출범한 2021년 이후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최대 지각 변동이 일어날 전망이다. 양사 시가총액을 합하면 8조엔(약 75조원)에 달한다. 혼다의 작년 차 판매량(398만대)과 닛산 판매량(337만대)을 합치면 735만대로 현대차그룹(730만대)을 밀어내고 글로벌 3위가 된다. 2022년부터 계속된 도요타그룹, 폴크스바겐그룹, 현대차그룹의 1~3위 구도가 깨지는 것이다.
18일 나온 혼다와 닛산의 합병 검토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자동차 경쟁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혼다와 닛산은 최근 전체 판매량의 4분의 1 안팎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중국 업체들에 밀리며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다. 중국 시장이 빠르게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후발 주자인 일본 기업들에 타격이 컸다. 그동안 일본차들은 상대적으로 전기차 전환이 늦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멕시코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 등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두 회사 모두 멕시코에 공장을 두고 미국으로 차를 수출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한때 무적이었던 일본의 자동차 산업이 테슬라와 중국 경쟁사의 도전에 의해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라고 했다.
양사 실적은 악화 일로에 있다. 혼다는 지난 3분기(7~9월) 영업이익과 글로벌 판매량이 작년 동기 대비 14.6%, 11.7%씩 줄었다. 닛산은 3분기 영업이익과 판매량이 작년 동기 대비 각각 84.7%, 2.4% 줄었다. 닛산은 지난달 전 세계 직원의 7% 안팎인 9000명을 해고하고 생산량 20%를 감축하기로 했다.
이날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닛산 주가는 23.7% 급등한 반면, 혼다 주가는 3.04% 하락 마감했다. 닛산이 최근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간 상황에서 합병으로 인한 수혜가 더 클 거라는 지적이다. 특히 닛산은 경쟁자인 도요타, 혼다와 비교할 때 하이브리드 모델이 부족한 것이 최근 실적 부진을 키웠는데, 혼다가 이 분야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단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전기차·소프트웨어 혁신에 속도 낼 듯
양사의 협력으로 전기차, 소프트웨어를 비롯한 미래차 분야에서 시너지가 날 거란 전망이다. 닛산은 전기차가 보급되기 전인 2009년 전기차 ‘리프’를 내놓으며 전기차 개발에 앞장섰다. 테슬라가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기 전 글로벌 시장을 이끌던 전기차였다. 닛산이 최대 주주로 있는 미쓰비시자동차도 향후 닛산과 혼다의 협력에 합류할 전망이다. 미쓰비시도 2000년대 중반부터 경형 전기차를 내놓으며, 전기차 분야에서 앞서 나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혼다와 닛산은 각각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 기술에 있어 시너지가 생길 것”이라며 “(합병은) 전기차 경쟁력 강화 목적이 가장 크다고 본다”고 했다.
이미 양사는 올 들어 전기차 분야에서 협력하겠다고 시사해 왔다. 지난 8월 포괄적인 업무 제휴를 맺고 자동차 소프트웨어, 부품 공통화 등을 협의했다. 당시 미베 도시히로 혼다 사장은 “100년 만이라는 자동차 산업의 변혁기”라며 “전동화나 지능화를 둘러싼 과제가 속도감 있게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차 반격 시작되나
혼다와 닛산이 합병할 경우, 글로벌 3위 자동차 기업 중 두 개가 일본 기업으로 채워질 전망이다. 한층 커진 몸집을 바탕으로 추락한 일본차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일본차 업체들은 최근 중국차의 부상, 전기차 전환과 같은 문제 외에도 느린 의사 결정과 같은 고질적인 관행으로 글로벌에서 존재감이 점차 희미해진다는 평을 받았다. 일본 인구가 2010년대 중반부터 줄고, 급여 수준도 늘지 않아 내수 소비가 줄어드는 것도 원인이다.
이항구 원장은 “일본이 디지털화에서 밀렸고, 자동차 배터리,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아직 약하다는 점에서는 우려가 있다”며 “합병 직후 구조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앞으로 과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