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 인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뉴스1

29일 원·달러 환율이 13년 4개월 만에 1350원 선을 넘어서고 코스피가 2% 넘게 하락하면서 금융 시장이 흔들린 이유는 달러 초강세 현상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지난 26일(현지 시각) 전례 없이 강경한 어조로 ‘인플레이션 파이터’가 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았다. 한국 경제의 위험 요소인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3고(高)’ 현상이 더 심해지고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수입 물가가 오르고, 금리 상승으로 투자와 소비가 위축될 경우 성장 둔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강해질 강달러 태풍

달러화는 주요국 통화에 대해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다. 유로화·엔화·파운드화 등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말하는 달러 인덱스는 이날 109.3 내외에서 움직이며 200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로의 경우 예년에는 1유로당 1.2달러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1유로당 1달러 정도로 가치가 하락했다. 위안화도 이날 달러 대비 가치가 최근 2년 사이 최저치로 내려갔다. 블룸버그통신은 “아시아 금융시장의 자금 유출 위험이 장기화할 수 있으며, 6월 이후 주가 반등이 모두 사라지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면 상당수 국가들이 수입 물가가 오르는 고충을 겪는다. 또한 달러에 맞서 자국 화폐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금리 인상도 잇따르고 있어 세계 경제가 둔화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외채는 달러로 갚아야 하기 때문에 강달러가 계속되면 국가 부도 상황에 직면하는 나라들이 세계 각지에서 속출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29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스마트딜링룸 전광판에 주가와 환율 시세가 표시돼 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전 거래일보다 19.1원 오른 1350.4원에 마감했다. 환율이 1350원을 돌파한 것은 2009년 4월 이후 13년 4개월 만에 처음이다. /이태경 기자

연준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이 미국 경제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은 지난 28일 CNN 인터뷰에서 “연준의 금리 인상이 미 경제를 침체에 빠트리고 대규모 실업 사태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며 연준을 비난했다. 그는 “파월이 금리를 올려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고물가와 튼튼한 경제보다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물가와 수백만명의 실업자”라고 했다.

◇1365원 뚫린다는 전망도 있어

이날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원화 가치가 급락한 것도 마찬가지로 달러 선호 현상이 길게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때 달러당 1368원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해 그와 비슷하게 단기적으로 환율이 1365원 안팎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한·미 간 금리 격차 확대로 국내에 들어온 해외 투자금이 유출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원화뿐 아니라 다른 주요 통화들도 모두 달러 대비 약세”라며 “1997년 외환 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은 시기는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올해 들어 달러 대비 가치가 하락한 폭이 지난 26일 기준으로 원화가 10.7%로서 유로화(12%), 엔화(15.9%), 파운드화(12.4%), 위안화(7.3%) 등과 비교할 때 특별히 더 위험에 처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 총재는 인터뷰를 통해 “자본이 해외로 나가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국민연금,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불안감을 해소시키려 애썼다.

2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달러·원 환율은 19.1원 오른 1350.4원으로 거래를 마치며 13년 4개월여 만에 1350원을 돌파했다. /뉴스1

전문가들은 이 총재의 설명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일본, 중국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지적도 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일본은 일부러 경기 부양을 위한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측면이 있고 엔화가 국제 통화라는 강점이 있다”며 “중국의 경우 자본 자유화 없이 아직도 통제가 가능한 나라라서 비상시 자본 유출을 막을 수단이 없는 우리나라와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뾰족한 대응 방법 없어 정부 고민 깊어

문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원화 가치 하락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원화 매도세가 강하다기보다는 너도 나도 달러를 사려는 움직임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가 달러 강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지난 23일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서 “달러 강세와 원화 약세의 통화 상황이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리스크 관리를 잘하겠다”고 했지만 환율 상승세가 꺾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 금융감독원은 이번 주 중으로 ‘공매도 조사팀’을 신설해 즉각 가동시킬 예정이다. 공매도 엄단을 통해 금융시장 불안을 완화하겠다는 포석이다. 민간의 한 환율 전문가는 “큰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당국에서 지속적으로 구두 개입을 하고 환 투기를 하는 세력들을 단속하는 것이 환율 상승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줄여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