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F16 전투기를 몰았던 공군 장교 출신입니다.”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이스라엘의 경제 중심지인 텔아비브. 이곳에 본사를 둔 전자상거래 이상거래 차단 기술 업체 리스키파이드의 여성 최고운영책임자(COO) 나마 오펙 아라드는 자신을 소개하며 군(軍) 경력을 가장 먼저 내세웠다. 제대 후에는 미국 명문 노스웨스턴대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받고, 글로벌 컨설팅사 BCG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했다고 한다.

자기 소개에서 군 경력을 강조하는 이런 낯선 모습은 이스라엘의 다른 스타트업에서도 많이 발견됐다. 이스라엘의 사이버 보안 업체인 XM사이버의 노암 에레즈 대표는 “우리는 모사드(이스라엘 대외 첩보부) 출신들이 주축이다. 러시아·북한의 해킹을 99% 이상 막을 수 있는 기술을 갖췄다”고 했다. 이 회사는 모사드 전 원장 등이 모여 2015년 설립했고, 작년 11월 유럽 최대 유통 기업인 슈바르츠그룹에 7억달러(약 1조원)에 인수됐다.

현대차·네이버·이마트·넥슨·GS칼텍스 등 11개 한국 기업 고위 임원 30여 명은 지난달 23일부터 5일까지 2주간 현대카드가 현지에서 개최한 ‘현대카드 테크캠프 이스라엘’에 참가해 이스라엘 기업 55곳을 탐방했다. 참가 기업들은 모두 현대카드와 제휴사(PLCC) 계약을 맺은 국내 대표 기업들이다. 참석한 CEO(최고경영자)급만 14명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이스라엘을 스타트업 강국으로 만든 비결 중 하나로 군이 꼽힌 것이다.

현대차·네이버·이마트·넥슨·GS칼텍스·쏘카·무신사 등 한국 기업 11곳의 대표·임원들이 지난달 26일 이스라엘의 전기차 배터리 초고속 충전 기술 업체인 스토어닷을 방문해 회사 소개를 듣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5일까지 이스라엘에서 현대카드가 주관한 '현대카드 테크캠프 이스라엘'에 참가해 기술력이 뛰어난 이스라엘 스타트업 탐방에 나섰다. /텔아비브(이스라엘)=최형석 기자

◇‘현대카드 테크캠프 이스라엘’ 르포 민·관·학에 군(軍)까지 가세한 이스라엘 벤처 산업

이스라엘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남자는 2년 8개월, 여자는 2년 간 군 복무 뒤 대학에 진학한다. 국가는 군 복무 기간을 국방력 이외 과학기술 강화에도 최대한 활용한다. 연간 50명만 뽑는 탈피오트 부대에 입대하면 3년간 이스라엘 최고 명문 히브리대에서 수학·물리학·컴퓨터공학 학위를 받고, 6년간 군에서 혁신 무기를 개발한다. 유명한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도 탈피오트 출신들이 개발했다. 탈피오트와 쌍벽을 이루는 8200부대는 엘리트 정보 부대다. 컴퓨터·보안 기술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며, 이 부대 출신이 설립한 스타트업이 1000개가 넘는다. 이스라엘 기업들은 구인 조건으로 이런 군 부대 경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통상 스타트업 생태계는 정부와 민간, 대학이 힘을 합치는 민·관·학 협력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군대도 벤처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까지 합세한 결과 작년 이스라엘에서는 기업가치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이상 스타트업을 뜻하는 유니콘이 42개나 생겨 현재 총 98개에 달한다. 인구는 940만명으로 한국의 5분의 1에 못 미치지만, 유니콘 수는 한국(23개)의 4배 이상이다.

이스라엘은 인구 1500명당 스타트업이 1개로 세계 1위이고, 나스닥 상장 기업 수(98개)는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다. 다국적기업은 없지만, 스타트업들 혁신이 수입으로 이어져 작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1430달러로 독일(5만801달러)보다 높았다.

◇“자식을 스타트업 개발자로 만드는 게 요즘 이스라엘 부모 소원”

이스라엘은 국가 브랜드가 ‘스타트업 네이션(창업 국가)’일 정도로 전 국가가 거대한 창업 인큐베이터로 운영된다. 1억달러(약 1400억원) 이상 투자되는 ‘메가 펀딩’ 숫자는 2018년 7건에서 작년 88건이 돼 3년 만에 13배 가까이로 급증했다.

이번 행사 기획에 참여한 이스라엘 VC(벤처펀드) 요즈마글로벌의 야니브 골드버그 혁신센터장은 “유대인 부모가 과거에는 자식이 변호사·의사가 되길 바랐다면, 최근에는 이스라엘 6000여 스타트업의 개발자가 되길 꿈꾼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한국 기업들은 이스라엘 기술 도입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국내 패션 플랫폼 1위 업체 무신사의 조만호 의장은 “이상거래 적발 기술 기업 리스키파이드와 미팅을 잡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게임사 넥슨코리아 이정헌 대표는 “클라우드 보안 관련 기술 접목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GS칼텍스는 충전 5분 만에 160㎞ 주행 가능한 전기차 배터리를 개발 중인 ‘스토어닷’과 협력을 타진하기로 했다. 이마트는 콩과 붉은 채소 비트 등으로 스테이크를 재현해 햄버거 체인 버거킹에 납품까지 한 이스라엘 대체육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이스라엘 기업들은 높은 기술을 꽁꽁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일즈하는 것이 강점”이라며 “계약 협상 시 한국 기업끼리 협력해서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는 방안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