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로 시작된 금융시장의 불안이 원자재 시장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안전 자산인 금(金) 등 귀금속 가격은 상승한 반면, 구리 등 산업재는 경기 침체 우려를 반영해 하락세다. 특히 지난달 중순부터 상승세를 보였던 국제 유가는 SVB 사태 이후 최근 1년간 최저 수준인 배럴당 60달러대로 급락했다. 전문가들은 금융시장의 혼란이 지속될 경우 유가가 반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유가 1년 3개월 만에 60달러대

지난 20일(현지 시각)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날보다 90센트(1.35%) 상승한 배럴당 67.6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의 크레디스위스 전격 인수 결정으로 금융권의 위기가 다소 진정된 영향이다. 그러나 21일 새벽 1시에는 다시 0.9%가량 하락한 배럴당 67달러 수준에 거래됐다. 아직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WTI는 지난 10일 배럴당 76.78달러에서 13일 74.80달러로 1거래일 만에 2.5% 하락한 후 6거래일째 60달러대에 머무르고 있다. WTI가 60달러대까지 떨어진 것은 1년 3개월 만이다. 유가는 올해 들어 중국의 경제 활동 재개 등으로 수요 회복이 기대되면서 줄곧 80달러 안팎을 오갔다. KB증권 오재영 연구원은 “SVB와 크레디스위스 사태의 파장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적어도 수개월은 지속될 가능성을 전제하면 유가는 하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며 “기존에는 3월을 전후해 국제유가가 저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보다 유가 하락 기간이 길어질 것 같다”고 했다.

◇유가 인버스 ETN 웃고, 레버리지 ETN 울고

유가가 급락하자 원유 선물에 투자한 개인 투자자들의 희비가 갈렸다. 2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3월 들어 전체 ETN(상장지수증권) 중 가장 수익률이 높았던 상품은 원유 가격을 역으로 2배 추종하는 ‘신한 인버스 2x WTI원유 선물 ETN’으로 지난 1일부터 20일까지 30.77% 상승했다. 이 기간 ETN 수익률 1위부터 11위까지가 모두 원유 선물을 역으로 2배 추종하는 ‘곱버스’ 상품이었다.

반면 원유 선물 가격을 그대로 추종하거나 2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은 수익률 하위권에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하나 S&P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ETN’이 이 기간 26.91% 하락해 원유 선물 ETN 중 가장 큰 하락세를 보였다. 또 ETN 수익률 하위 11~18위가 모두 원유 선물 ETN이었다. 같은 기간 에스오일과 SK이노베이션도 각각 8.6%, 2.3% 하락하는 등 정유주도 하락세를 보였다.

천연가스 ETN의 성적은 더 처참했다. 3월 들어 ETN 수익률 하위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천연가스 선물 레버리지 상품이었다. 지난해 연말부터 하락세를 보여온 천연가스 가격이 올 들어서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천연가스 가격은 원유 대비 변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균 삼성증권 연구원은 “유가는 주식시장 대비 두세 배의 변동성을 보이는데, 천연가스는 유가보다도 두세 배 높은 변동성을 보인다”며 “천연가스 ETN은 원유 ETN 대비 급등락하는 경향성이 크다”고 했다.

◇국내 소비자물가 둔화에도 영향

은행권의 위기가 국제유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번 사태가 실물 경기 둔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김소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최근 국제유가는 거시경제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최근 OECD 원유재고가 늘어나는 등 원유 수급 시장은 초과공급인 반면 원유 수요는 예상보다 따듯한 겨울철 날씨의 영향으로 완만한 상황인 것도 이유”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금융 시장 혼란이 금융위기로 번질 경우 원유 가격이 일시적으로 급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KB증권은 지난 17일 보고서에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국제유가가 고점 대비 70% 하락한 것을 고려하면 상반기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선까지 내려앉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낮아진 유가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세 둔화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2월 올 상반기 평균 국제유가를 배럴당 84달러(두바이유)로 지난해 11월 전망(배럴당 93달러) 대비 10% 가까이 낮췄다. 유가 하락으로 물가상승률은 0.3%포인트 낮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