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9일 기업들이 반도체·이차전지 등과 같은 첨단 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국가 산업단지(국가 산단)의 입지 규제를 대폭 완화하기로 했다. 현재는 국가 산단 내 기업들이 종사하고 있는 기존 산업 업종에 대해서만 산단 시설용지를 쓸 수 있지만, 이를 풀어 기업들이 산단 내에서 새로운 첨단 업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장비 도입을 쉽게 하기 위해 안전 심사 절차를 완화하는 등 총 55건의 규제를 개선해 6000억원의 민간 투자를 유치하는 방안도 나왔다.

◇전남 광양 국가산단 규제 풀어 포스코 투자 유치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첫 사례로 포스코가 신사업 추진을 검토 중인 전남 광양 국가 산단을 방문해 “포스코그룹의 투자가 조속히 이뤄지도록 현행 제도를 적극 해석하고, 법령 개정이 필요한 사항은 상반기 중 입법예고를 완료해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될 경우, 포스코는 광양 국가 산단 내 광양제철소 동쪽 해상의 동호안(東護岸) 부지에 앞으로 10년간 4조4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다. 동호안은 바다로부터 제철소 부지 침식을 막기 위해 설치한 제방으로, 포스코가 1989년부터 제철소와 동호안 사이 230만평(약 760만㎡) 넓이의 바다를 매립(현 60~70% 완료)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19일 오후 전남 광양시 광양국가산단 동호안 부지에서 포스코 측으로부터 부지 개발 경과와 향후 활용 계획 등을 듣고 있다. 포스코는 이날 동호안에 제철 관련 산업이 아닌 신산업도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뉴시스

현재 포스코는 매립 부지를 코크스 공장, 원료 야드, LNG(액화천연가스) 터미널 등으로 사용 중이지만, 이 부지를 활용해 이차전지 소재나 수소·에너지 등의 신사업을 진행하는 방안도 검토해 왔다. 하지만 현행법에 따라 해당 부지에 제철 관련 업종만 입주하도록 규정돼 있던 만큼, 제철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신사업 관련 시설은 입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포스코 역시 이날 광양 국가 산단에 첨단기술·녹색성장 기업의 입주가 가능해지도록 관련 조항을 신설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철강 업종이 아닌 계열사도 산단에 입주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를 요청한 것이다. 포스코경영연구원은 광양 국가 산단 입지 규제 완화에 따른 생산 유발 효과를 연간 약 3조6000억원으로 전망했을 뿐 아니라 부가가치 유발 효과는 연간 약 1조3000억원, 취업 유발 효과는 연간 약 9000명으로 추산했다.

동호안 부지 현장 점검에 한 총리와 동행한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은 “포스코그룹이 철강을 넘어 친환경 미래 소재 대표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신속한 관련 법령 개정과 광양국가산업단지 개발계획 변경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자료=포스코

◇규제 개선으로 민간 투자 6000억원 유도

또 이날 정부는 현장 애로를 해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55건의 규제 개선 과제를 발표했다. 독일 제약사 머크가 국내에 공장을 설립할 수 있도록, 환경 규제가 덜한 대체 부지를 정부가 직접 찾아주는 게 대표적이다. 머크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공장 부지를 물색 중이었다. 하지만 대상 지역이 화학물질 배출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라 대규모 공장 설립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정부는 2분기까지 공장이 들어설 수 있는 부지 목록을 제공해 공장 설립을 지원할 계획이다.

충남 서산 대산항 인근의 유휴 부지에는 민간 기업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임대 절차를 신속히 추진하기로 했다. 다음 달 중 기업들을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진행해 8월에 부지 활용 계획을 확정한다. 항만 인근에 공장을 두고 있는 일부 석유화학기업의 공장 추가 설립 등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경북 영덕군이 추진하는 해상 케이블카를 빠르게 설치할 수 있도록 2분기 중 관련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반도체 장비 안전 심사 절차도 간소화

공공기관이 직접 발굴한 개선 과제 41건도 나왔다. 반도체 장비를 도입할 때 안전 심사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도 있다. 현재 기업이 반도체 장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안전보건공단에 공정안전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때 모든 설비에 대한 도면을 제출해야 하는데, 영업기밀 유출 우려에 도면 제출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기업이 사전에 대표 설비를 선정해 도면을 제출하면 이후 추가 설비에 대해서는 도면 제출이 면제된다.

신산업·신기술 도입을 위한 규제 개선책도 나왔다. 발전사업용 전기저장장치(ESS·Energy Storage System)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기준이 완화된다. ESS는 태양광·풍력 등 불규칙적으로 생산되는 신재생에너지를 미리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저장 장치다. 오염물질이 많이 배출되는 것이 아닌데도 일반 발전소로 분류돼 1만kW 이상 규모로 설치할 때 무조건 평가 대상이 됐다. 정부는 이 기준을 10만kW로 완화하기로 했다.

액화수소 운반선과 추진선 안전 기준을 내후년 4분기까지 마련한다. 지금까지는 수소를 사용하는 선박에 대한 안전기준이 없어 액화수소 추진선 건조가 어려웠다.

정부는 그간 다섯 차례의 경제규제혁신 TF(태스크포스) 등을 통해 119개 규제 개선 과제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총 7조7000억원의 민간 투자를 지원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