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색 정장을 입고 16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는 전쟁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잊고 사는 것 같다. 물론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나보다 훨씬 더 힘든 국민이 많기 때문에 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TV조선

올레나 젤렌스카(45) 여사는 지난 4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추천사를 작성한 질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은 “젤렌스카 여사가 조국의 요구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기로 응답했다. 가족과 도피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과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위해 남는 길을 선택했다”고 썼다.

16일 조선일보와 만난 젤렌스카 여사는 “나는 우크라이나를 떠날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고 했다. 극작가였던 그녀가 ‘우크라이나의 비밀병기’로 불리며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전사가 된 것에 대해서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역사상 이렇게 잔인하고 비논리적인 전쟁이 내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매우 슬프고 참담하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그녀가 “전쟁터에 나간 아들에게 연락을 받지 못할까 봐 잠 못 이루는 어머니들의 심정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한 대목에서 통역을 하던 우크라이나 출신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가 울음을 터뜨리자, 젤렌스카는 “올레나, 울어선 안 돼. 우린 더욱 강해져야 해”라고 말해 모두가 숙연해졌다.

-당신은 유엔 특별회의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고, 죽거나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러시아의 전쟁 범죄 처벌을 위한 특별 사법기구 설치를 촉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인명 피해, 인권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강제로 러시아로 이주시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1만9000명 아이들이 납치됐다. 그들 중 300명만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러시아 어느 지역으로 이주됐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압력을 가해주길 바란다.”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가 2023년 5월 1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본지 김윤덕 선임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 제공

-전쟁 발발 후 지하 벙커에서 태어나는 아기들 뉴스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아기들이 무사히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한국 국민이 많다.

“작년보다 올해 더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고 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있다는 건 희망이다. 다만 미숙아로 태어나는 경우가 50% 급증했다. 임신부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탓이다. 인큐베이터 등 특별한 의료장비가 필요한 이유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모든 아이들은 안전하지 못하다. 미사일 드론 공습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들뿐 아니다. 봄이 되면서 밭으로 나간 농부들이 러시아 군이 설치해놓은 지뢰를 밟고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는 일이 급증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전 세계에 러시아 침공의 부당함을 알리며 “대통령이 여기 있다. 우리의 군이 여기에 있고, 시민들도 여기에 있다’고 해 감동을 줬다. 원래 그렇게 용감한 사람인가.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웃음의 대상이 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전쟁 후 남편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용기가 전쟁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 부각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볼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당신은 ‘전쟁으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 푸틴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고도 말했다.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용기를 내야 조국을 지키고 가족과 어머니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에 나간 아들에게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못 받을 때 그 어머니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빨리 전쟁이 끝나서 그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정원을 가꾸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웃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45) 여사가 16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본지 김윤덕 선임기자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TV조선

-전쟁 발발 1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크라이나가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중에서 모든 것이 힘으로만 해결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국가가 힘이 조금 더 세다는 이유로 다른 국가를 공격하고 마음대로 괴롭히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공격을 받는 모든 국가는 조국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권리가 있다. 우크라이나만의 전쟁이 아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지뢰 제거 장비와 전기버스, 수업용 태블릿 PC가 매우 필요하다고 들었다.

“도움이 절실하다. 특히 교사와 아이들을 위한 태블릿 노트북 같은 기기가 필요하다. 전쟁으로 대면수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피소가 있는 학교가 전체의 25%밖에 안 된다. 대피소가 있더라도 공습이 있는 날엔 아이들이 수업을 받다 대피소로 달려가는 시간도 부족하다.”

-당신은 트위터에 ‘전쟁에서 살아남아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뤄낸 한국은 나에게 용기를 준다’고 썼다.

“한국은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모범이자 희망이다.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를 많이 방문해 주셨으면 좋겠다. 내 조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다.”

☞올레나 젤렌스카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 크리비리흐에서 태어났다. 남편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곳 출신, 나이도 같다. 17세 때 같은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나 대학교 때부터 교제하기 시작했다. 코미디언과 극작가였던 이들 커플은 2003년 결혼해 현재 19세 딸과 10세 아들을 두고 있다. 여사의 결혼 전 성(姓)은 키야슈코였지만 결혼하면서 남편 성인 젤렌스키(Zelenskyy)에 여성형 어미 ‘a’를 붙여 젤렌스카(Zelenska)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