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기부를 평소 철학으로 삼아왔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이곳’ 만큼은 이례적이게 이름을 공개한 상태로 억대 기부금을 쾌척했다. 바로 학술·예술·사회발전 등 각 분야 인재 육성에 힘쓰는 호암재단이다.

23일 호암재단이 국세청에 공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재단 총기부금 52억원 중 이 회장이 2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 삼성전자가 42억원으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냈고 삼성디스플레이(3억원), 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각 1억원), 삼성증권(6000만원), 삼성물산·삼성엔지니어링(각 5000만원), 삼성에스원(2000만원)도 기부에 동참했다. 개인 자격으로는 이 회장이 유일한 셈이다.

이 회장이 실명을 밝히면서 기부에 나선 것을 재계에서는 이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지난 3월 구미 삼성전자 스마트시티를 찾아 사회공헌활동을 활발히 하는 직원 9명과 만난 뒤 “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싶은데 얼굴이 알려진 탓에 쉽지 않다”며 “여기저기 익명으로 기부를 많이 하려 한다. 빼 놓지 않고 기부를 챙기는 곳이 외국인 노동자 단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회장(앞줄 왼쪽)이 지난해 5월 31일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2022 삼성 호암상 시상식'에서 수상자들과 기념 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런 이 회장이 호암재단에 실명으로 기부금을 전달한 것은 2021년(4억원)에 이어 두 번째다. 1997년 설립된 호암재단은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경영 철학을 후대에 계승·발전시키고 각 분야 발전과 복지 증진에 기여한 인사를 포상하는 공익 법인이다. 이 회장이 이곳에 이름을 밝혀 기부한 것 역시 선대 회장의 인재제일·사회공헌 정신과, 본인이 그간 강조해온 인재 육성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재단이 매년 시상하는 삼성호암상도 잘 알려져 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1990년 제정한 것으로, 과학·공학·의학·예술·사회공헌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 글로벌 리더로 인정받는 국내외 한국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다. 첫해부터 올해까지 170명의 수상자가 나왔고 수여된 상금은 325억원이다. 이 회장이 종종 시상식을 찾아 직접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미 국무부에서 열린 국무장관 주최 국빈오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에는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한국인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하면서, 2021년 삼성호암상을 받았던 이력이 재조명됐다. 특히 허 교수는 이 회장의 제안으로 ‘물리·수학’ 부문을 신설한 이후 처음 배출된 수상자였는데, 때문에 기초과학 인재 육성에 대한 이 회장의 안목까지 언급됐었다.

그밖에 역대 수상자 중에는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학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유전체학 연구 분야의 흐름을 주도한 찰스 리 미국 잭슨랩 교수, 나노구조 물질 관련 새 연구 분야를 개척한 유룡 카이스트 특훈교수,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 등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를 휩쓴 봉준호 감독도 예술상 부문을 받은 적 있다.

올해는 여성 과학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졌고 역대 최연소 수상자도 탄생했다. 명단은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임지순 포스텍(포항공대) 석학교수 △과학상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 미국 위스콘신대 교수 △공학상 선양국 한양대 석좌교수 △의학상 마샤 헤이기스 미국 하버드의대 교수 △예술상 조성진 피아니스트(역대 최연소) △사회봉사상 사단법인 글로벌케어 등 개인 5명과 단체 1곳이다. 시상식은 6월 1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