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현국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43)씨는 지난 5월 카드사에서 연 10% 금리로 1500만원을 급하게 빌렸다. 김씨는 신용점수가 1000점 만점에 880점대로 옛 신용등급 기준으로는 3등급에 해당하는 고신용자이지만, 시중은행에서는 돈을 빌리기 어려웠다. 은행들이 신용대출에 적용하는 등급 기준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2~3년 전엔 시중은행에서 연 3~4%대 금리로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씨처럼 신용점수가 높은 편인데도 시중은행에서 퇴짜를 맞고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이나 카드·캐피탈사 등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중·고신용자들이 늘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고금리 장기화 등으로 연체율이 오르면서 은행들이 건전성 관리를 위해 대출 문턱을 높이자 기존 은행 고객 일부가 2금융권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이나 P2P(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 등을 통한 중금리 대출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중신용자들이 대출받기 어려운 ‘금리 단층’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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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급 아니면 은행 신용대출 깐깐해져

16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5월 국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평균 신용점수는 922.6점으로, 지난해 말(903.8점)보다 18.8점 높아졌다. 800점대까지 떨어졌던 지난해 11월(899.4점)보다는 23.2점이나 높다.

신용평가사인 KCB(코리아크레딧뷰로) 점수 기준으로 1등급은 942점 이상, 2등급은 891~941점, 3등급은 832~890점이다. 신용등급을 기준으로 하면 은행권 평균 대출등급이 지난 6개월간 2등급 하위권~3등급 상위권에서 2등급 상위권으로 높아졌다. 고신용자(1~3등급)라도 2등급 중·하위권부터는 은행 대출을 받기가 한층 까다로워진 것이다.

◇연체율 증가, 신용점수 인플레가 원인

은행 대출이 깐깐해진 것은 연체율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어서다. 지난 2021년 말 0.21%에 불과했던 국내 은행 연체율은 지난 3월 말 0.33%까지 올랐다. 부동산 PF 부실과 경기 부진,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이들이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소비자들의 신용점수가 올라가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 현상도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지는 배경이 됐다. 소득 및 금융 이력 외에도 통신비·국민연금·보험료 등 각종 납부 내역을 신용평가사에 등록하면 신용점수가 올라가면서 고신용자가 급증한 것이다. KCB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신용점수 900점을 넘는 사람은 전체의 42%(2053만468명)에 달했다. 10명 중 최소 4명 정도는 1~2등급인 것이다. 신용점수 900점 이상 비중은 3년 전(36%)보다 6%포인트 늘었다. 신용점수 변별력이 떨어지다 보니 최근 은행들은 자체 신용평가 모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신용점수가 높아도 어느 정도 규모의 사업장에 다니는 직장인인지, 현재 다른 곳에서 대출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등을 꼼꼼히 살핀다”고 말했다.

◇'금리단층’ 심각...”중금리 경쟁 활성화해야”

시중은행 대출이 어렵다면 인터넷은행이나 P2P 업체에서 중금리 대출을 받는 것이 차선책이다. 하지만 인터넷은행 역시 지난해 말부터 올해 5월 사이 대출자의 평균 신용점수가 55.7점이나 상승(840.6→896.3점)하는 등 심사를 대폭 강화하는 추세다. 중·저신용자 대상 중금리 대출을 크게 늘려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터넷은행 3사(케이뱅크·카카오뱅크·토스뱅크)의 중·저신용자 대출 비중은 여전히 평균 20%대에 그치고 있다. P2P는 업계 전체 신용대출 잔액이 2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실효성이 없다. 이렇다 보니 중신용자 상당수가 연 10% 넘게 이자를 내야 하는 저축은행이나 카드·캐피탈사의 문을 두드리는 실정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중금리가 실종된 금리 단층 현상을 지적했다. 한은은 “우리나라는 금리 연 6% 이하와 연 14% 이상 구간 대출 비중이 높고, 연 7~13% 구간에서 낮은 수준을 보이는 쌍봉 형태를 보이고 있다”며 “금리단층 구간의 업권 간 중금리대출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금융기관과 대출자 간 정보 비대칭성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