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에 위치한 한 마트에 같은 크기로 진열된 우유의 용량이 900mL로 표시돼 있다. /뉴스1

“이건 사기이고, 추악한 일입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9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과의 전쟁을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더 적은 용량에 더 많은 돈을 내게 하는 관행이 늘고 있고,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제조 업체들이 제품 용량을 줄일 때 변경 사항을 크게 표시해 소비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지난달 발의했다.

고물가 시대 기업이 가격을 올리는 대신 용량이나 주요 재료 함량을 줄여 가격을 올린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리는 슈링크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다. 기업들의 가격 인상은 소비자 저항과 정부 압박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말도 없이 용량을 줄이는 ‘꼼수’로 소비자를 속이려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식품 업체들도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과자와 냉동식품, 주류 등의 용량을 슬그머니 줄이고 있다.

그래픽=양진경

◇”표시만 하면 불법 아냐” 허점에 주요국 ‘고지 의무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은 제품 포장지에 소비자가격과 함께 중량·개수 등을 표시해야 한다. 하지만 표시 내용이 바뀔 때 고지할 의무는 없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제품 용량을 은근슬쩍 줄여버리면, 소비자들은 눈뜬 채로 가격이 오르는 걸 당하고 있어야 하는 셈”이라고 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몰래 용량을 줄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국내에서 풀무원이 지난 3월 9000원짜리 핫도그 1봉지의 핫도그 개수를 5개에서 4개로 줄였지만, 최근에야 알려져 논란이 됐다. 맥주 한 캔 용량을 375mL에서 370mL로 1.3% 줄이면, 사실상 그만큼 가격 인상을 한 셈이다. 일종의 ‘숨은 인플레이션’이다.

지금까진 각국 소비자단체와 유통 업체 등이 슈링크플레이션의 감시자 역할을 해왔다. 미국 소비자가격 정보 사이트인 ‘마우스 프린트’의 에드거 드워스키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게토레이 페트병 용량이 32온스(oz)에서 28온스로 바뀐 사실 등을 고발했다. 지난 9월엔 프랑스 대형 마트 ‘카르푸’가 가격 인하 없이 용량이 적어진 제품에 대해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스티커를 붙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각국 정부마저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브라질은 지난해부터 제품 용량을 바꾸면 소비자에게 6개월간 알리도록 하는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6월 리터(L) 또는 ㎏당 가격을 포장지에 표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독일 정부도 슈링크플레이션 대응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캐나다는 지난달 프랑수아필리프 샴페인 산업장관이 “슈링크플레이션처럼 소비자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적발하고 조사하는 ‘식료품 태스크포스’를 출범한다”고 밝혔다.

◇'품목별 물가 담당’ 세운다지만... ”단위 가격 강조해야”

우리나라는 이달 들어 28품목에 대해 전담 공무원을 배치하고 ‘물가 잡기’에 나서고 있다. 품목별 물가 동향을 관리하고, 업체와 소통하며 물가 인상 요인을 잡는다는 것이다. 여기엔 슈링크플레이션 대책도 추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전담 공무원들이 업체와 협의 과정에서 가격뿐만 아니라 용량도 건드리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품목별로 물가를 잡겠다는 식의 접근은 단기적으로 가격이 안정된 것 같은 착시효과를 주지만, 점점 업체들의 ‘꼼수 인상’ 등을 초래해 나중에 더 큰 폭의 가격 상승을 유발한다”고 했다.

이에 해외처럼 용량이 바뀌는 걸 소비자에게 크게 알리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향후 경기가 좋아져도 줄어든 용량을 돌려놓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며 “소비자가 쉽게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변경 사항을 제품에 적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단위 가격 표시제’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현재 대형 점포에선 가공 식품(62개), 일용 잡화(19개), 신선 식품(3개) 등의 판매 가격과 함께 단위 가격을 표시하게 돼 있다. 우유 1리터(L) 상품에 100mL당 가격을 써놓게 하는 식이다. 정부 관계자는 “소비자단체와 소비자원 등이 판매 가격은 그대로인데 단위 가격이 높아진 품목 등을 조사해 공표하고, 소비자들도 단위 가격을 살피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양을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기업이 제품 가격을 그대로 두면서 용량은 줄이는 식으로 가격 인상 효과를 노리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