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상장회사에 사외이사 제도가 본격 도입된 때는 IMF 외환 위기로 재벌 대기업들이 속속 무너지던 1998년이다. 어느새 26년이 흘렀다. 이젠 사외이사가 CEO(최고경영자)와 한통속이 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소유 분산 기업(소유가 분산돼 오너십이 없는 기업)인 금융지주, 민영화된 공기업 등에서 기존 CEO가 사외이사들과 이른바 ‘자신만의 참호’를 파고 ‘셀프 연임’을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인 조명현 고려대 교수를 지난 16일 만나 대기업 오너나 소유 분산 기업 CEO들이 사외이사들과 맺는 짬짜미를 막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해봤다. 조 교수는 작년 1월 금융위원회의 대통령 업무 보고 때 소유 분산 기업 CEO들의 ‘참호 구축’ 문제를 제기했고, KT가 작년에 ‘셀프 연임’으로 시끄러웠을 때 해결 방안을 만들었던 ‘KT의 뉴거버넌스 구축 TF(태스크포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16일 인터뷰에서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경영진과 같이 전략을 논하려면 기업 경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사외이사가 돼야 한다”며 “애플의 CEO(최고경영자) 팀 쿡이 나이키의 선임 사외이사인 걸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 CEO에 포획되는 사외이사

- CEO의 소위 ‘참호 구축’은 왜 나타나나.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고, CEO를 잘 견제한다면 참호 구축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오너 경영자나 전문 경영인을 막론하고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려 한다면 이사회를 포획해 자신만의 참호를 만들려고 할 유인이 있다. 특히 CEO가 볼 때 사내이사는 이미 자기 사람이니, 사외이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 한국에만 있는 현상인가.

“아니다. 영어로 ‘entrenchment(참호 구축)’라고 한다. 랜들 모크 앨버타대 교수, 안드레이 슐라이퍼 하버드대 교수, 로버트 비시니 시카고대 교수가 공동으로 쓴 ‘오너십과 시장가치’란 선구적인 논문이 1988년에 나왔다. 이들은 미국 기업에서 ‘참호 구축’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세 학자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MSV 논문’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 그들은 어떤 얘기를 했나.

“오너 경영자나 창업자의 지분이 높아질수록 기업 가치가 높아지는데, 일정 수준이 지나면 오히려 기업 가치가 떨어진다는 걸 발견했다. 경영진 지분이 적을 때는 지분이 늘어날수록 자신과 기업의 이해관계가 일치돼 더 열심히 기업 가치를 늘리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 지분이 늘어나 안정되면 사내·외 인사들과 참호를 구축하고 안주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적용하면 오너 지분이 높아져도 기업 가치가 안 오르는 데엔 일종의 참호 구축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지금 미국 기업은 나아 보인다.

“미국 기업들도 과거엔 CEO 가족과 친구들을 사외이사로 불렀고 기업을 모르는 명망가를 이사회에 앉혀 ‘회사의 장식품’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미국 경제가 고꾸라지자, 이사회가 주도적으로 무능한 CEO를 쫓아내고 후임을 제대로 뽑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사회를 독립적으로 굴리면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미국 기업들의 이사회는 평균적으로 한국보다 낫게 운영되고, 좀 더 체계적이고 독립적이다. 다만 모든 미국 기업이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테슬라 이사회는 CEO 일론 머스크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 “사외이사 3년 단임으로 해 보자”

- 한국에선 소유 분산 기업에서 참호 구축이 심하다는 비판이 많다.

“금융지주의 경우 CEO와 사외이사 임기가 차이 나는 게 참호 구축에 영향을 준다. 회장 임기는 3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반면 사외이사는 임기를 최대 5년이나 6년이라 해 놓고, 처음 2년 후에 1년씩 연임을 시킨다. 그러다 보니 사외이사들이 연임하려고 회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사외이사로선 회장이 연임시켜줬으니 CEO인 회장 연임에 반대하기 어렵다. 짬짜미가 구축되는 것이다.”

- 임기를 바꿔 참호 구축을 막을 수 있을까.

“이사회 연구를 위해 금융지주 사외이사들 만나 인터뷰해 보면, ‘그냥 3년 단임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어느 정도 임기가 보장되면 연임 눈치 안 봐도 되니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금융지주의 사외이사는 3년 단임으로 하는 게 참호 구축을 막는 데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래픽=김하경

- 소유 분산 기업인 KT의 새 지배구조 구축 때도 고민하지 않았나.

“당시 낙하산 CEO를 막으면서도 참호 구축도 못 하게 하는 제도를 설계하려 했다. 우선 CEO 첫 선임 때는 주주총회에서 60% 이상 찬성 요건을 둬 낙하산 CEO가 되기 어렵게 했다. 통상의 50%보다 높인 것이다. 연임 때는 3분의 2 찬성인 특별결의를 받도록 했다. 기존 CEO가 사외이사를 장악해서 셀프 연임을 하려고 해도 주주들의 압도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면 연임할 수 없게 했다.”

◇ 거수기 이사회는 어떻게 바꿀까

- 사외이사가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비판이 많다.

“반대가 거의 없는 이유는 문제 되는 안건이 대부분 사전설명회 등에서 걸러지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의 안건 찬반 이슈보다는 진짜 역할이 뭔지를 봐야 한다. 미국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사 임무 중 하나는 기업 장기 전략을 수립할 때 기여하는 것이다. 회사 경영진과 같이 수립할 수도 있고, 회사 경영진이 만든 전략에 도전하는 역할을 해서 많이 고치도록 할 수 있다. 전자는 구글 같은 회사고, 후자는 애플 같은 회사다. 하지만 한국은 회사 전략을 수립할 때 이사회 관여가 거의 없다. 사후 보고 정도다.”

- 어떻게 바꿔야 하나.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경영진과 같이 전략을 논하려면 기업 경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사외이사가 돼야 한다. 애플의 CEO 팀 쿡이 나이키의 선임 사외이사인 걸 참고하자. 우리나라 상법엔 경영진이란 단어가 없다. 대신 경영은 이사회가 한다고 돼 있다.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역할은 세 가지다. 첫째, 견제와 균형이다. CEO를 견제하되, 무조건 CEO를 적대시하고 반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집단지성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 CEO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서 그걸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외이사들이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얘기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집단지성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셋째, 외부 시각으로 회사를 본다는 것이다. 회사 내부 시각으로만 보다 생기는 위험을 피하게 할 수 있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 조명현 고려대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고려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 교수는 CEO 견제를 위해서 사외이사들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고 했다. / 오종찬 기자

[한국과 미국의 이사회 구성 비교]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율, 미국은 85% 한국은 51%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이사회 구성을 비교하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처럼 가야 한다고 보지만, 한국 기업들이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어 우선 제대로 준비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한국의 이사회 구성은 삼일PwC 거버넌스센터의 ‘2023 이사회 트렌드’를, 미국은 컨설팅사 스펜서 스튜어트의 ‘2023 미국 이사회 지수’ 보고서를 참고했다.

―미국 사외이사 비율은 85%, 한국은 51%다.

”미국의 사외이사 비율이 85%지만, 더 나아가 요즘 미국에선 ‘이사회 회의에 CEO 빼곤 사내이사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에 많아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한국은 사외이사들이 기업 경험이 거의 없는 관료, 법률가, 교수 등 명망가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사외이사를 확 늘리면 회사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 한국에선 경륜 있고 통찰력 많은 사외이사가 늘어나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이사회는 평균 10.8명, 한국은 6.9명이다.

”코스닥 상장사에 4인 이사회가 많다. 자산 2조원 미만 기업은 이사회에 사외이사가 4분 1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4인 이사회면 사외이사는 1명만 두면 된다. 사외이사는 기업의 필요가 아니라 법 때문에 두는 귀찮은 존재이고 비용이라 생각하는 회사가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사외이사는 외부 시각으로 기업을 도와주는 사람이다’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사외이사들도 어떻게 하면 회사 가치를 높일지 고민하고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이 미국은 46%인데, 한국은 9%에 불과하다.

”성별 다양성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 외에 연령, 전문 분야도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기업 경영을 하다 보면 다양한 소비자가 있다. 다양한 시각에서 소비자들을 보고, 리스크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조명현 교수는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밴더빌트대 오언 경영대학원 조교수를 거쳐 1997년부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 2016~2019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 교수는 대한항공, SK브로드밴드 등에서 사외이사를 지냈고, 현재는 현대글로비스에서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사외이사

회사 경영진이나 구성원이 아닌 이사를 가리킨다. 미국에선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라고 부른다. 선임 사외이사는 대표이사나 사내이사가 이사회 의장일 경우 사외이사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