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의장/쿠팡 제공

국내 최대 이커머스 기업 쿠팡의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올해 공정거래위원회의 동일인(기업 집단 총수) 지정에서 제외됐다. 공정위는 15일 올해 공시 대상 기업 집단(대기업 집단) 지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쿠팡의 동일인을 김 의장이 아닌 ㈜쿠팡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2021년 쿠팡을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한 이후 지난해까지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고 쿠팡의 모회사인 쿠팡Inc가 미국 법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올해는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해 ‘친족이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거나 임원으로 재직하는 등 경영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대주주 개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의 예외 조건을 신설했다. 김 의장은 올해 이 예외 조건의 적용을 받아 4년 연속으로 공정위의 규제 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면 이날 대기업 집단으로 신규 지정된 하이브·파라다이스·영원 등 7개 그룹은 모두 오너(대주주)가 총수로 지정돼,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개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4촌 이내 친족과 3촌 이내 인척의 주식 보유 현황을 공시해야 하고 부당내부거래 금지 같은 공정위 규제를 받는다. 다른 나라에 없는 세계 유일의 ‘갈라파고스 규제’로 불리는 대기업 집단·동일인 지정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면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러스트=박상훈

쿠팡은 한국 법인인 ㈜쿠팡의 지분 100%를 미국 모회사(쿠팡Inc)가 갖고 있고, 쿠팡Inc의 의결권 76.7%를 김 의장이 갖고 있다. 김 의장이 사실상 쿠팡Inc를 통해 ㈜쿠팡을 지배하는 것이다.

공정위는 쿠팡이 2021년 4월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된 이후 김 의장의 동일인 지정에 대해 ‘갈팡질팡’ 행보를 보였다. 첫 지정 때는 쿠팡의 실질적 지배자인 김 의장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김 의장을 동일인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당시 김재신 공정위 부위원장 등은 “에스오일 같은 외국계 기업 집단은 개인이 아니라 모회사나 주력사인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왔다”고 했다. 김 의장만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재계와 학계는 물론이고 공정위 안에서도 “국내 기업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일자 다음 달 조성욱 당시 공정위원장은 “(동일인 관련 규제는) 내·외국인 차별 없이 적용돼야 한다”면서 제도 개편 연구에 착수하겠다고 했다. 2022년에는 외국인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시행령 개정을 추진했지만, 미국과의 통상 마찰 등을 우려하는 정부 다른 부처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래픽=양인성

◇김범석 지정 놓고 오락가락한 공정위

김 의장의 동일인 지정을 둘러싼 혼선은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해 6월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김 의장이 동일인으로 볼 만한 실체를 갖추고 있다”며 시행령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공정위 안팎에선 “외국인이더라도 국내 주력 대기업 집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경우 가족 단위 감시를 받게 되는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이달 초 국무회의를 통과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은 “오너의 친족 등이 계열사 경영에 관여하거나 자금 거래를 하지 않을 경우 오너 개인이 아닌 주력사인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예외 조건을 담고 있다. 공정위는 쿠팡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다. 가상 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의 송치형 의장도 같은 이유로 동일인 지정을 피했다. 올해 동일인이 지정된 삼성·현대차 등 88개 기업 집단 가운데, 이런 예외 조건을 적용받아 총수 가족이 감시망을 피한 경우는 쿠팡과 두나무 등 2곳뿐이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법인이 동일인인 대기업 집단의 경우 공정위 규제의 강도가 총수가 동일인인 기업 집단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다. 이른바 ‘주인 없는 회사’인 농협의 농업협동조합중앙회나 포스코의 포스코홀딩스㈜ 등이 이런 경우다. 계열회사 간 자금 거래 내역 공시 의무 등이 강화되는 것을 제외하면 가족 회사 간 일감 몰아주기 등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갈라파고스 규제’ 논란

1987년 4월 공정위 전신인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실이 현대와 대우, 삼성, 럭키금성 등 33개 기업 집단을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한 이래 정부는 공정거래법을 수차례 고쳐 대기업 집단 규제를 강화해왔다. 2013년에는 총수 일가 사익 편취 금지 규정을 도입, 특정 기업 집단의 계열사가 총수 일가가 일정 비율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계열회사와 부당한 내부 거래를 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총수가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4년째 이어진 쿠팡 특혜 시비를 계기로 세계 유일의 동일인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현행 대규모 기업 집단 규제는 과거 창업주 개인이 순환출자형 또는 피라미드형 기업 집단 형태로 운영하며 경영권을 승계했던 폐해를 억제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도입 등 최근 경향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동일인 지정 제도는 단지 기업의 규모를 이유로 제재하는,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공정위는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과 총수 일가 회사 간의 부당 내부 거래 가능성이 여전하기 때문에 동일인을 중심으로 한 기업 집단 지정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동일인과 대기업 집단 지정 제도의 존속 필요성에 대한 논란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우선 현행 법률에 따라 과도한 기업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동일인

삼성그룹의 이재용 회장이나 농협의 농업협동조합중앙회처럼 특정 대기업 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사람이나 법인. 공정거래위원회는 동일인의 4촌 이내 친척과 3촌 이내 인척이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들을 계열회사라고 보고 부당 내부 거래를 금지하는 등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대기업 집단 지정과 동일인 모두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