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넘은 나이에도 은퇴하지 못하고 직업 전선에 나서는 60대 이상 연령층이 늘고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의 한 주민센터 민원실 입구에서 장년층 구직자들이 급식 도우미 모집 포스터를 보고 있다. /전기병 기자

서울에 사는 채모(62)씨는 2년 전 대기업에서 정년 퇴직했지만, 작년부터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전 직장에 비하면 월급이 절반 이하로 깎였지만, 26세인 취업 준비생 아들이 직업을 구할 때까지 ‘아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씨는 “연금으로 받는 돈으로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아들의 등록금 대기도 벅차다”며 “청년 취업난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3~4년은 더 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취업·결혼·출산을 하는 나이가 20대에서 점점 30·40대로 밀리는 ‘지각 사회’ 현상으로 노인들의 은퇴 나이도 그만큼 늦춰지고 있다. 현재 법정 정년인 60세까지만 벌어서는 30대 초반까지 취업을 준비하는 자녀 세대를 부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60대 후반(만 65~69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5.5%이다. 이 나이대 전체 인구 가운데 일을 하고 있거나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다.

그래픽=이철원

지금 60대인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들은 산업화 시대의 주역으로 20대 초중반부터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열심히 일해왔다. 그러나 정년 퇴직을 한 다음에도 또다시 두 번째 일자리를 찾아 5~10년 이상을 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평균 수명이 더 늘어나고 국민 연금의 고갈 가능성이 커지는 20~30년 뒤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경기도에 있는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모(62)씨는 회사 정년인 65세까지 직장 생활을 계속할 계획이다. 같이 사는 31세 아들이 2년 전 취직한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이씨가 곧바로 은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녀 키우느라 모아놓은 돈도 얼마 없는 데다 아들의 결혼 자금 마련에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결혼할 때 ‘현직 아버지’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씨는 “신입 사원 월급이래봤자 빤하기 때문에, 그 돈은 신혼집 마련용으로 저축하라 했다”며 “내가 벌 수 있을 때까지는 가정 살림을 책임지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시골로 내려가 은퇴 생활 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부러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이씨처럼 정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령층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국내 65세 이상 노인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1%를 기록했다. 경제활동 참가율(경활률)은 인구 대비 ‘취업자+실업자’의 비율로, 직장 생활을 하거나 직장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다. 노인 10명 중 4명은 취직자이거나 구직자란 얘기다.

일러스트=김현국

◇60대 후반 경활률이 20대 초반 넘어

특히 60대 후반(65~69세)의 경활률은 55.5%로 절반이 넘는데, 이는 20대 초반(20~24세·48.9%)을 넘어서는 수치다. 원래는 20대 초반이 앞섰지만, 5년 전인 지난 2019년 역전됐다. 지난 2006년부터 60대 초반 경활률이 20대 초반을 앞선 데 이어, 13년 만에 ‘연쇄 추월’이 벌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청년 구직자들의 취업이 늦어질수록, 일터로 나가야 하는 60대 이상 고령층이 그만큼 더 많아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많은 고령층 가장들이 현재도 돈을 벌고 있지만, ‘앞으로도 쭉’ 벌고 싶다고 희망하고 있다. 통계청이 55~79세를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계속 근로하고 싶다”고 답한 비율이 2012년 59.2%에서 2023년 68.5%로 11년 동안 9.3%포인트 늘었다. ‘언제까지 일하고 싶냐’는 질의에 대한 답(평균 근로 희망 연령)도 평균 71.7세에서 73세로 1.3세 늘었다. 앞으로는 70대까지 일하는 것이 ‘뉴 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픽=이철원

◇아들이 ‘칼졸업’해도 아빠는 환갑

이는 현재의 출산 연령 추세를 보면 확인된다. 작년 한국 여성이 첫 출산을 하는 나이는 평균 33세였다. 30년 전보다 약 7년 늦어졌다. 첫째가 아들일 경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면 엄마 나이는 약 58세, 아빠는 60세 정도란 얘기다. 한국 남성의 첫 결혼 연령이 여성보다 평균 2.5세 많기 때문이다. 결국 휴학 한 번 안 한 ‘효자 아들’이라도 대학 졸업식엔 ‘환갑 아빠’가 가게 된다는 소리다.

이 때문에 최근 아이를 가진 30~40대들은 아예 예상 은퇴 시기를 70대 이상으로 열어 놓고 있다. 2년 전 첫째 아들이 태어난 직장인 김모(38)씨는 “일흔 살 되기 전에 아들 결혼식이 열린다면 행운일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 빈곤율 1위' 한국, ‘지각 사회’에 취약

전문가들은 고령층의 ‘은퇴 지각’을 부르는 자녀의 취직·결혼·출산이, 원래도 심각한 ‘노인 빈곤’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4%로 OECD 38국 가운데 1위다. 노인 빈곤율이란 66세 이상 노인 중 소득이 중위소득(소득 순으로 순위를 매겼을 때 딱 중간에 해당하는 소득)의 절반에 못 미치는 비율이다. OECD 평균치(14.2%)의 3배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선진국에 비해 노인층에 대한 국가의 지원 규모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미 많은 노인이 돈을 벌고 있는 현재도 이렇게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 ‘지각 사회’ 현상이 앞으로 더 가속화되면 고령층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에서 특단의 대책을 세워 짐을 덜어주지 않으면, 가난 비관에 따른 자살 등 각종 사회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민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라이프 사이클(인생 주기)이 지연되면서 고령층이 짊어지는 사회·경제적 부담이 과도하게 커지고 있다”며 “앞으론 유럽처럼 대학 등록금을 무료 수준으로 낮추는 등의 파격적 방식으로 60대들의 교육비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