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10여 년 묵은 ‘망 분리 규제’를 일부 허물기로 했다. 금융사가 새로운 금융 상품 개발을 위해 챗GPT 등 인공지능(AI)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망 분리 규제는 인터넷에 연결되는 외부망과 개인 금융 정보 등이 담겨 있는 내부망 서버를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13일 금융위원회는 경기 김포에 있는 KB국민은행 통합 IT센터에서 김병환 금융위원장 주재로 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금융 분야 망 분리 개선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간 국내 금융회사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를 내부 업무에 활용하지 못했다. ‘망 분리 규제’ 때문이었다. 2013년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이버 테러로 국내 금융사 전산망이 뚫리면서 망 분리가 의무화됐다. 외부의 공격이 우려되니 아예 외부와 절연해 버리자는 것인데, 그간 급격하게 변하는 IT 환경에서 금융사 경쟁력을 저하해온 일종의 ‘쇄국 규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금융사도 챗GPT 활용할 수 있게

망 분리 규제 완화는 단기·중기·장기 3단계로 진행한다. 우선 올해 규제 샌드박스(특례)를 도입해 금융권 내부 시스템과 외부 AI의 연결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금융사가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하면 가명 처리된 정보를 챗GPT 등 외부 AI에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망 분리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해 생성형 AI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 대출 심사, 고객 응대, 이상 거래 탐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JP모건 등 글로벌 금융사들이 AI로 자산, 투자 이력, 소비 행태를 분석해 고객별 포트폴리오 작성에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비슷한 서비스가 개발될 것이라는 기대다.

그래픽=송윤혜

여기에 더해 화상회의·인사관리 등 금융사 내부의 비중요 업무에만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허용했던 각종 소프트웨어에 대한 규제를 풀어 보안관리·고객관리 등의 업무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2단계로는 1단계로 진행한 규제 샌드박스의 성과를 검증해 규제 특례의 상시 제도화를 추진한다. 금융사의 생성형AI 활용이 안정적이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금융사가 가명 정보가 아닌 개인 신용 정보를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3단계에서는 별도의 ‘디지털 금융보안법’을 제정해 금융사가 각자 보안을 책임지게 하겠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계획이다.

◇“혁신 금융 상품 단번에 나오긴 어려워”

금융권에서는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분위기다. 그동안 금융사 외부망에서 내부망으로 자료를 이동하기 위해 대규모 휴대용 저장장치 등을 거쳐야 해, 번거로웠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예를 들어 그동안에는 고객 대상의 챗봇 Q&A(문답)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하려 할 때 생성형 AI를 활용하지 못해 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다량의 정보를 구하기 힘들었다”며 “앞으로 생성형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고객의 수준에 맞춰 답변하는 서비스도 개발할 수 있고, 고객에게 어떤 금융 상품이 적합한지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금융사들은 비용 절감 효과도 기대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기존에는 외부에서 제공하는 AI나 클라우드 설루션을 쓸 수 없고 자체 개발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었는데, 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폐쇄적인 금융 IT(정보기술) 환경이 단번에 확 변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한 인터넷은행 관계자는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원천 데이터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데, 망 분리 해소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망 분리 완화가 소비자 이익으로 바로 직결되는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그동안 너무 폐쇄적이었던 정부 방침을 약간 풀어주겠다는 식 정도로 해석하는 분위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