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현국

구글·애플·네이버·카카오 등 대형 플랫폼을 미리 독과점 사업자로 지정해 끼워팔기나 자사 우대 같은 불공정 행위를 금지하는 ‘사전 지정제’ 도입이 무산됐다. 유럽 등 선진국은 사전 지정제를 통해 초대형 플랫폼이 시장 지배력을 남용하는 행위를 강력히 규제하고 있는데, 한국은 이런 글로벌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 ‘플랫폼 공정 경쟁 촉진을 위한 입법 방향’을 발표하며 “사전 지정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전 지정제란 빅테크 플랫폼을 ‘지배적 플랫폼(독과점 사업자)’으로 정해 놓고, 이들이 기득권을 바탕으로 다른 플랫폼이나 입점 업체에 불리한 반칙 행위를 했을 때 일반 기업에 비해 더 신속하고 강하게 규제하는 방식을 말한다.

구글 같은 거대 플랫폼이 중소형 경쟁사를 시장에서 몰아내기로 작정하면 피해는 곧바로 발생한다. 당국이 조사에 1~2년 이상을 허비하는 사이, 빅테크가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구글이 유튜브를 광고 없이 볼 수 있는 ‘유튜브 프리미엄’ 상품을 판매하면서 ‘유튜브뮤직’을 끼워 판 사건의 경우 작년 2월 공정위 조사가 시작됐지만, 아직 제재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후발 주자인 유튜브뮤직은 멜론 등 선발 업체들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유럽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선 사전 지정제를 도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이와 정반대로 작년 12월부터 추진했던 사전 지정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공정위 측은 “사전 지정제를 도입하고 싶었지만, 업계 반발이 워낙 거세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플랫폼 관련 규제를 총괄해야 하는 당국이 업계를 설득하지 못하고 ‘핑계 대기’에만 바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대형 플랫폼들의 시장 지배력이 커질수록, 최근 이들을 통해 확산되는 딥페이크나 폭력물 등 각종 불법 콘텐츠가 더욱 극성을 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공정위는 “‘사전 지정제’는 빠졌지만, 이번에 ‘사후 추정제’를 도입해 독과점 플랫폼에 대한 효과적 통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사후 추정제란 독과점 플랫폼의 반칙 행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정 기준을 넘어서면 ‘지배적 플랫폼’으로 추정해 제재 수위를 높이는 제도다. 위반 행위마다 플랫폼의 독과점 여부를 따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 지정제에 비해 신속한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픽=김현국

사후 추정제로 지배적 플랫폼으로 인정되면 과징금 부과율이 현행 ‘관련 매출액의 최대 6%’에서 ‘최대 8%’로 올라간다. 플랫폼이 독과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강화되고, 공정위가 ‘위반 행위를 당장 그만두라’고 임시 중지 명령도 부과할 수 있다. 지배적 플랫폼으로 인정되기 위해선 우선 연 매출이 4조원 이상이어야 한다. 단일 플랫폼 기준으로 시장점유율이 60% 이상이고 월간 이용자 수도 1000만명을 넘어야 한다. 과점 플랫폼의 경우 상위 3곳의 점유율 합계가 85% 이상, 월간 이용자가 각각 2000만명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사후 추정 방식은 ‘사전 지정제’보다 제재의 신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독과점 여부를 판단하려면 시장점유율을 계산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통상 수개월 이상 걸린다. 이기재 소상공인연합회 온라인플랫폼공정화위원장은 “공정위가 업계 점유율을 계산하는 사이에 중소 플랫폼과 입점 업체들의 피해는 빠르게 누적될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구글·애플·MS 등 7곳 사전 지정

한국과 달리 주요국은 거대 플랫폼을 제재하기 위해 ‘사전 지정제’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지난 3월 전면 시행된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 Act·DMA)’이 대표적이다.

DMA는 거대 플랫폼 사업자를 ‘게이트키퍼(독과점 사업자)’로 지정해 특별 의무를 부과한다. 당초 EU는 게이트키퍼에 구글 모회사 알파벳,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6사를 꼽고 이들이 제공하는 핵심 플랫폼 서비스 22개를 규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후 5월에는 여행 사이트 부킹닷컴도 게이트키퍼로 추가 적용해 총 7개 기업이 됐다. EU는 매출과 월간 활성 사용자 수,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게이트키퍼를 정한다.

게이트키퍼에는 경쟁을 촉진하고 불공정 행위를 예방해야 하는 18가지 의무가 부과된다.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경쟁을 저해하는 행위를 하거나 자사 서비스를 우대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쟁사 제품보다 우선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금지된다. 예컨대 구글에서 검색하는 경우 구글의 자체 서비스가 상단에 노출되면 안 된다. 메타는 인스타그램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페이스북 운영에 쓸 수 없다. 기업들은 정기적으로 자사의 서비스와 규제 준수와 관련된 내용을 EU 집행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런 식의 18가지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총 매출액의 최대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영국에선 디지털시장, 경쟁소비자법(DMCC)이 올해 말 시행을 앞두고 있다. 게이트키퍼와 유사하게 거대 플랫폼 기업에 전략적 시장 지위(SMS·Strategic Market Status)를 부여해 규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과 인도도 애플·구글 등 거대 디지털 기업을 지정해 이들을 별도로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쿠팡·배민은 ‘지배적 플랫폼’에서 제외될 듯

‘지배적 플랫폼’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비판도 나온다. 공정위 기준대로라면 구글(유튜브 등), 애플(앱마켓), 카카오(카카오톡), 네이버(검색) 등 대형 플랫폼은 포함되지만, 쿠팡이나 배달의민족(배민)은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고 업계는 추정한다. 쿠팡이 속한 이커머스 시장에서 상위 3사의 점유율이 85% 미만이고, 배민은 매출 4조원 요건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공정위의 ‘사전 지정제’ 추진이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배경엔, 스타트업 등 IT 업계에서 공정위에 대해 불신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공정위가 강한 규제 권한을 쥐면 자의적으로 각종 조사에 착수해 업계 전체를 고사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는 것이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당초 사전 지정제의 취지는 중소형 플랫폼을 돕자는 것이었는데, 이들이 오히려 법안에 반대하면서 공정위가 추진 동력과 명분을 잃게 됐다”고 말했다.

☞사전 지정제·사후 추정제

사전 지정제: 자사 우대나 끼워팔기 같은 불공정 행위를 신속하게 제재할 수 있도록 일정 요건을 갖춘 독과점 플랫폼을 미리 ‘지배적 사업자’로 정하는 제도다. 유럽연합(EU) 경쟁 당국이 ‘디지털시장법(DMA)’을 제정해 구글(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바이트댄스 등 빅테크를 지배적 사업자로 사전 지정해 규제하고 있다.

사후 추정제: 불공정 행위가 발생한 뒤 해당 플랫폼이 독과점 사업자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제도다. 지배적 사업자에 해당하는지를 추가로 따져봐야 한다는 점에서 사전 지정제보다 규제 신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