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에서 손주가 할머니를 업고 가는 모습. 아픈 조부모나 부모 등을 돌보느라 학업마저 미루게 되는 10대 ‘영 케어러’가 서울·경기 지역에서만 7만명 넘게 존재한다는 연구 보고서가 발표됐다. 전국적인 영 케어러 규모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게티이미지뱅크

경기도에 살고 있는 중학생 A(14)군은 3년 전 혈액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홀로 모시며 살고 있다. A군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급여 월 117만원을 받지만 어머니 간병을 위해 2000만원의 빚까지 지게 되면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사소한 일상조차 A군에게는 사치다.

열악한 환경에서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10대 ‘영 케어러(young carer)’들이 서울·경기 지역에만 7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면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학교가 이들을 찾아내 적절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30대까지 합치면 12만명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몸이 불편한 할머니 봉애(손숙 분)를 돌보는 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처럼 20·30대 들어서도 부모나 조부모를 돌보느라 꿈을 저당 잡힌 경우까지 합치면 영 케어러 규모는 12만명을 넘는다. 서울에 사는 B(26)씨는 7년 전 아버지가 뇌전증으로 쓰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어머니와 B씨가 번갈아가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 남은 한 명은 간병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부터 편의점과 식당 등에서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지만, 매달 아버지에게 필요한 주사비만 400만원이 넘는 탓에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B씨는 “아버지를 돌본 게 경력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어서 진로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온다”고 말했다.

일러스트=김성규

영 케어러 절반은 홀어머니 봉양

20일 한국사회보장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경기의 9~39세 영 케어러 가운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모자 세대가 52.1%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영 케어러 2명 중 한 명은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셈이다. B군처럼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있지만 부모 간병과 가족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부모 자녀 세대’ 영 케어러가 29.3%로 뒤를 이었다. 11.3%는 자녀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경우였고, 손자·손녀가 할아버지·할머니를 돌보는 조손 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1.1%였다.

영 케어러들은 빠듯한 형편 탓에 진로마저 위협받고 있다. C(17)군은 호흡기 장애가 있는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느라 하교 후 음식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주말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지적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어머니 대신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김승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아동옹호본부장은 “지난달 기준으로 전국 지자체 87곳이 영 케어러 지원 조례를 제정했지만, 연령이나 부양 기준 등은 여전히 통일돼 있지 못한 실정”이라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학교가 영 케어러 찾아내야”

3년 전 대구에서 아픈 아버지를 간병하다 살인을 저지른 22세 청년의 ‘간병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원도 물꼬를 텄다. 그러나 아직 영 케어러의 전체 규모조차 불명확한 상황이라, 지원받는 대상은 매우 제한돼 있다. 영 케어러들이 자신의 사연을 드러내기 꺼린다는 점도 이들의 정확한 규모 파악을 막는 장애물이다. 2021학년도 기준 초·중·고 학업 중단 학생 3만2027명 중 1만9189명이 장기 결석·가사 등의 사유로 학업을 중단했는데, 이 중 상당수가 가족 돌봄 청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 케어러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손 들고 나서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발굴이 필요하다”며 “중·고등학교에서 가정 상담 등을 통해 영 케어러들을 찾아내고, 지역 복지센터 등과 연계해줘야 한다”고 했다. 치매 조부모나 알코올 중독 부모를 돌보는 일을 어린 손주에게 떠넘기지 말고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김보영 영남대 휴먼서비스학과 교수는 “영 케어러에게 생계비 일부를 보조해주는 수준의 지원책에 머물러선 안 된다”며 “영 케어러 가구에 대해 간호·간병서비스를 확대하는 등 돌봄 부담을 덜어줄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