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일러스트=김성규

창업 100년이 넘은 굴지의 제약 기업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의 비만 신약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두 회사의 희비(喜悲)가 갈리고 있다.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가 2021년 비만 신약 ‘위고비’를 출시해 지난 3년 동안 시장 1위를 지켰는데, 후발 주자인 미국의 일라이 릴리가 ‘먹는 비만약’ 개발에서는 앞서가면서 조만간 1·2위가 뒤집힐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당뇨와 비만 치료제 부문에서 한 우물을 파온 노보 노디스크의 독보적 입지가 일라이 릴리의 발 빠른 인공지능(AI) 활용 전략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그래픽=김성규

◇비만약 최강자 흔드는 AI 전략

일라이 릴리는 지난 17일 경구용(먹는) 비만·당뇨 치료제로 개발 중인 ‘오포글리프론’이 임상 3상 시험에서 9개월 복용에 몸무게가 평균 7.3㎏ 줄어드는 등 유의미한 체중 감량 효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발표 직후 일라이 릴리 주가는 전날 대비 무려 14% 올랐고, 경쟁사 노보 노디스크 주가는 7% 빠졌다. 시장은 일라이 릴리가 앞으로 비만·당뇨병 치료제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황은 반대였다. 당뇨·비만약 부문에서만큼은 노보 노디스크가 승기를 쥐고 있었다. 노보 노디스크와 일라이 릴리는 둘 다 1923년부터 당뇨 치료용 인슐린을 판매해 왔지만, 이 분야 전문성은 노보 노디스크가 강했다. 노보 노디스크는 1978년 세계 최초로 대장균을 이용해 인간 인슐린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1985년 세계 처음으로 펜 형태의 인슐린 주사제를 출시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또 2014년에는 GLP-1 유사체 기반의 비만 치료제로는 세계 최초로 ‘삭센다’를 출시했고, 2021년 비만 신약 ‘위고비’로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작년 말부터다. 노보 노디스크는 지난해 12월 차세대 비만 신약 ‘카그리세마’의 임상 결과를 발표했으나, 그 결과가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주가 급락을 겪었다. 여기에 위고비가 계속해서 공급 부족 사태를 겪는 상황에서 일라이 릴리가 개발한 먹는 비만약이 임상에서 앞서가면서 노보 노디스크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위고비는 일주일에 한 번 주사를 놓는 방식인데 일라이 릴리가 개발 중인 먹는 비만약은 알약 형태로 하루 한 번 복용한다. 먹는 약이 투약 비용도 낮을 뿐 아니라 복용 편의성도 뛰어나 비만약 수요를 대폭 끌어올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BMO 캐피털 마켓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라이 릴리가 당뇨병 비만약 시장에서 노보 노디스크를 곧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업계는 일라이 릴리가 먹는 비만약 개발에서 빠르고 우수한 임상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로 ‘개방적인 AI 전략’을 꼽고 있다. 일라이 릴리는 최근 2~3년 사이 AI 플랫폼을 활용한 신약 프로젝트 100여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오픈AI, 크리스탈 파이(XtalPi), 제네틱 립, 아톰와이즈 같은 외부 기업들과 잇따라 제휴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임상 설계부터 실시간 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후보 약물 도출, ‘먹는 신약’의 경로를 찾는 것까지 AI로 빠르고 정확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노보 노디스크는 외부 AI 기업과 협업하기보다는 자체 내부 AI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 온 편이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AI 플랫폼을 만들었지만, 효율을 높이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시장 분석 업체 디암체어트레이더는 “일라이 릴리가 AI를 통해 시장 확장성을 빠르게 키워왔다면, 노보 노디스크는 내부에서 개발한 약물의 효율 향상을 위해 AI를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쪽”이라고 했다. 일라이 릴리는 인수·합병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엔 면역 분야 신약 업체인 다이스세러퓨틱스와 생명공학 기업 버사니스바이오를 잇따라 사들였다. 비만약을 복용할 때 생기는 부작용인 ‘근육 감소’를 줄이기 위한 시도로 분석된다.

그래픽=김성규

◇먹는 비만약 출시가 관건

비만 치료제 시장이 이제 ‘먹는 비만약’ 경쟁으로 넘어가면서 앞으로 일라이 릴리와 노보 노디스크의 경쟁을 판가름할 열쇠는 출시 시기와 생산량이 될 전망이다. 현재까지는 일라이 릴리가 한발 앞서는 모습이다. 먹는 비만약 임상 3상을 마쳐 FDA 승인과 출시도 노보 노디스크(임상 2상 중)보다 빠를 전망이다. 일라이 릴리는 2020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총 500억달러 이상을 제조 시설 확장에 투자해 노보 노디스크보다 생산 능력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일각에서는 노보 노디스크가 100년 넘게 당뇨·비만약 치료에 대해 전문성을 강화해 온 기업인 만큼, 앞으로 반등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노보 노디스크는 차세대 비만약 ‘카그리세마’ 외에도 먹는 비만약 ‘아미크레틴’의 추가 임상 시험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비만 약 업계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