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가 삼성전자에 ‘스파이 이사’를 심고, 국민연금이 대기업에 ‘노동 이사’를 앉히는 것도 가능하다.”
10일 서울 코엑스에서 한국자동차산업연합회·반도체산업연합회·석유화학협회·철강협회·중견기업연합회 등 26개 업종 및 경제 단체가 개최한 산업발전포럼은 최근 정부와 여당 의원들이 추진하는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성토장이었다. 요즘 기업들은 그동안 ‘설마설마’했던 상법 개정안을 개별 국회의원이 아닌, 법무부가 직접 발의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법이 통과될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포럼에 참석한 재계 관계자는 “통상 정부 입법안은 관계 부처 협의와 공청회 등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계 의견이 반영됐지만, 현 정부 들어서는 경제 단체들이 수시로 의견을 전달해도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며 “그렇게 통과된 법은 기업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감사 분리 선출, 국민연금이 이사회 개입 가능
이날 전문가들은 특히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에 담긴 ‘감사위원 분리선임제’가 적대 세력의 스파이 이사 선임을 가능하게 해 기업의 존폐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기업 활동을 감시·감독하는 ‘감사’는 주주들이 뽑은 이사회 구성원 중 한 명을 선출하도록 돼 있다. 이때 지배주주(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는 지분이 아무리 많아도, 3% 이상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주주 권한을 보호하면서도, 감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법무부는 그러나 감사의 독립성을 더 강화해야 한다면서 감사를 겸직하는 이사는 기존 이사회에서 뽑는 게 아니라 따로 선출하도록 했다. 최대 주주 의결권은 똑같이 3%로 제한된다. 송원근 연세대 객원교수는 “이렇게 되면 경쟁사나 엘리엇 같은 투기 자본이 스파이 이사를 선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면서 “대주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이사가 선임되는, 주식회사의 근간을 흔드는 유례없는 제도”라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입법의 진의를 말하진 않지만, 지분 5% 이상을 확보한 국내 기업이 300여개에 달하는 국민연금이 친노동계나 시민단체 인사를 이사로 앉혀 사기업을 공기업처럼 주무를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투기 자본은 국내 유력 기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지난해 미국 벌처펀드(기업을 사냥감 삼아 단기 차익을 챙기는 펀드) 엘리엇은 현대차 주식 2.9%를 들고 현대차의 수소연료전지 경쟁사이자, 중국 회사가 최대 주주인 발라드파워시스템 회장을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2003~2005년 SK와 경영권 대결을 벌인 소버린 자산운용은 보유한 SK 주식 14.99%를 펀드 5개로 쪼개 2.99%씩의 의결권을 행사, 자기 사람을 감사위원에 앉혔다.
권재열 경희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장)는 “3% 지분을 획득한 외국계 펀드나 기업들의 합종연횡이 비일비재할 것”이라며 “투기적 자본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를 위한 법이냐… 소액 주주에도 도움 안 돼'
이날 포럼에선 상법 개정안에 담긴 ‘다중대표소송제’에 대한 비판도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불법 행위를 한 자회사(또는 손자회사) 이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상장사 지분 0.01%만 보유해도 대표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가총액이 약 14조원인 LG 주식을 2주(약 16만원)만 사면, 수십개의 LG그룹 자회사 임원들을 상대로 소송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모회사와 자회사 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사건에서 자회사 주주들만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적대적 자본이 모회사 지분을 인수해 소송을 남발할 수도 있다. 이는 지주사 체제를 구축한 기업집단에 위험을 가중시키는 제도로, 그동안 지주사 체제를 권장해온 흐름과도 배치된다. 권재열 교수는 “소송 리스크 대응 비용이 커지면서, 결국 물건 가격에 전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우용 상장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기업들 실적이 바닥인 이런 위기 시점에 꼭 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은 “하지 않아도 될 법률과 정책 남발로 사회적 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며 “기업이 활기차게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복지임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