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낮 12시 경기 하남 덕풍전통시장에 있는 한 분식점. 텅 빈 가게를 보다 못한 사장 이모씨가 빗자루를 들고 나가 가게 앞을 쓸었다. 한때 5일장이 서는 날이면 3만명이 모였던 시장이지만, 지금은 하루 3000명도 찾지 않는다. 코로나 영향도 있지만, 작년 2km 떨어진 곳에 코스트코 하남점이 생기면서 손님을 다 뺏겼다는 게 상인들 주장이다. 상인 김모(57)씨는 “코스트코가 들어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단골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작년 코스트코 출점 소식이 들렸을 때 지역 상인 1000여명이 몰려가 반대 시위를 했지만, 코스트코는 끄떡없었다. 정부가 5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자, 코스트코는 자진 납부해 20% 할인된 4000만원만 냈다. 김재근 덕풍시장연합회장은 “정부가 중재하면 국내 기업은 눈치를 보는데 코스트코는 말이 안 통했다”며 “자기들 입장에 따라 한국법이 유리하면 한국법, 미국법이 유리하면 미국법 들먹이면서 막무가내였고, 정부도 난감해할 뿐이었다”고 했다.
◇공정 경쟁 하자는 규제가 만든 역차별
정부 규제의 빈틈을 파고든 외국계 기업이 국내 산업 전반에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LED 조명, 중고차, 대형마트 등 국내 기업을 규제했다가 외국 기업이 부상한 분야는 수없이 많다.
과거 한때 빛을 내는 반도체인 발광다이오드(LED)를 활용한 조명 시장에 삼성과 LG가 뛰어들었다. 한국 시장을 평정한 뒤, 유럽 필립스, 미국 GE와 세계 조명 시장에서 붙겠다는 것이다. 2010년대 초 LED의 등장으로 백열등과 형광등 주도의 조명 시장이 흔들리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2011년 LED 주요 품목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했고 삼성과 LG는 철수했다. 이후 필립스, 오스람, GE 등 외국 기업들이 한국 시장을 파고들었다. 놀란 정부가 2015년 적합업종에서 제외했지만, 뺏긴 시장은 회복하지 못했다. 조명 업계 관계자는 “LED 조명 시장은 절반 이상이 외국 브랜드고 나머지는 중소기업이 중국산을 수입해 이름만 바꿔 파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스웨덴 브랜드 이케아는 최근 한국에서 연간 매장 방문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올해 회계연도(2019년 9월~2020년 8월)에 방문객 1232만명을 기록해 전년보다 480만여명이 늘었다. 매출은 32% 늘었다. 이케아 한국 공략의 핵심은 ‘주말 손님 싹쓸이’다. 국내 대형마트가 문을 닫는 둘째와 넷째 일요일, 이케아는 분주하다. 현행법은 복합쇼핑몰의 주말 의무 휴업을 강제하지만 이케아는 가구전문점이라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 이케아는 음식·생필품 등 가구 외 비중이 60% 정도다. 무늬만 가구점인 셈이다.
국내 중고차 시장도 규제가 판을 바꾼 사례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 1위는 SK엔카였다. 정부가 2013년 중고차 거래를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지정했고 SK그룹은 회사를 팔았다. 그러자 BMW 등 수입차 업체들이 연이어 뛰어들었다. 5년 전 5000여대를 팔던 BMW는 작년엔 1만대 이상을 팔았다. 현대차는 ‘국내 대기업’이라서 진출하지 못했다. 중고차 시장이 외제차 중심으로 흐르자, 국산 중고차는 제값을 못 받는 상황이 심해졌다. 수입차는 자사 중고차를 구매해 되팔며 보증해주지만, 국산은 재구매해주는 큰손이 없기 때문이다.
첨단 테크놀로지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으로 개인 정보를 받을 때는 항목을 세분화해 동의를 받으라’는 정부 가이드라인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다음은 개인 정보, 위치 정보, 프로필 정보 등 6개 항목을 각각 동의받는다. 구글은 한 번 클릭을 포괄적인 정보 동의로 간주한다. 구글이 다음보다 손쉽게 한국 이용자의 정보를 확보하는 셈이다.
◇포퓰리즘에 빠진 규제
전문가들은 “입법기관인 국회나 정부 부처가 제대로 시장 분석도 안 하고 무조건 ‘대기업 견제, 중·소상공인 돕기’라는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이 큰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올해 입법된 'n번방 방지법’은 러시아 메신저 업체인 텔레그램에서 발생한 범죄를 막는 규제였지만, 정작 텔레그램은 한국에 지사도 없어 규제할 방법이 없다. 국내 인터넷 기업만 규제 대상이 됐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도 국내 기업만 옥죄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다중대표 소송제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도 규제 타깃은 국내 기업이고, 외국에 본사를 둔 기업은 해당 사항이 거의 없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 정부는 문제가 터지면 규제부터 만드는 ‘입법 만능주의’가 심하다”며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규제부터 만드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