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국내 최대 음식 배달 서비스앱 ‘배달의 민족’(배민)을 인수한 독일 딜리버리히어로는 인수 발표 한 달 전, 한국 법인의 형태를 바꿨다. 음식 배달앱 요기요·배달통을 운영하는 한국 법인인 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를 유한회사에서 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한 것이다. 인수 이후 이 회사의 한국 음식 배달앱 시장점유율은 95% 이상이다. 독점이라는 지적이 예상되자, 실적을 공시해야 하는 유한회사에서 그럴 필요가 없는 유한책임회사로 숨은 것이다.

외국 기업들이 한국 상법의 허점을 비집고 정보 공개의 사각지대인 유한책임회사로 몰려가고 있다. 21일 본지가 주요 외국 기업의 한국 법인 등기를 열람한 결과, 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아디다스코리아, 이베이코리아(옥션·G마켓 운영), 네슬레코리아 등이 유한책임회사로 최근에 바꾼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정부가 외국 기업들이 기업 공시 의무가 없는 유한회사로 한국 법인을 운영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 유한회사는 2020년 실적부터 공개해야 한다’고 법을 고치자, 이번엔 외부 감사 면제 대상인 유한책임회사로 피해간 것이다.

◇외부 감사의 사각지대로 숨는 외국 기업

월트디즈니의 한국 법인은 한 해 1795억원의 매출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90억원을 로열티(사용료) 명목으로 본사로 송금했다. 엄청난 로열티 비용 탓에 영업이익은 183억원으로 줄고, 법인세는 42억원만 낸다. 외국 기업 본사와 한국 법인 간 과도한 로열티는 항상 ‘세금 탈루’의 소지를 낳아, 세무 당국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예컨대 한국 법인이 본사에 로열티를 덜 냈다면 그만큼 영업이익이 늘고, 법인세도 따라서 증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숫자는 2016년 실적이며 그 이후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가 2017년 주식회사에서 유한책임회사로 법인 형태를 바꿨기 때문이다.

국내 진출한 글로벌 기업 20사 등기 떼어봤더니

지난 20여년간 정부와 외국계 기업은 실적 숨기기와 공개라는 술래잡기 같은 공방을 벌었고 대부분 외국 기업이 한발 빨랐다. 본래 1990년대만 해도 외국 기업은 대부분 한국 법인을 주식회사로 설립했다. 한국 기업의 지분 투자를 받아, 공동으로 큰 자본을 형성하고 한국 시장을 공략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식회사는 외부 감사와 기업 실적 공개가 의무 사항이다.

하지만 프랑스 샤넬이 90년대 말 한국 법인을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전환했고, 이후 한국휴렛팩커드(전환 연도 2002년), 한국마이크로소프트(2005년), 애플코리아(2009년), 한국오라클(2009년), 루이비통코리아(2012년), 구찌코리아(2015년), 프라다코리아(2016년) 등이 줄줄이 따랐다. 구글코리아, 에르메스코리아 등은 한국 진출할 때 곧바로 유한회사를 세웠다. 돈이 충분한 외국 기업은 당시엔 ‘기업 실적 공개’ 의무가 없던 유한회사가 훨씬 이득이라고 본 것이다.

유한책임회사의 신규 건수

외국계의 유한회사 도피 20년 만인 2018년, 정부는 외부감사법을 개정, ’2020년 1월부터 규모가 큰 유한회사는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개정안에는 숨은 구멍이 있었다. 일반인은 차이를 이해하기도 어려운 유한회사나 유한책임회사지만, 유한책임회사는 여전히 외감 면제 대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21일 대법원 등기소의 법인 등기 집계에 따르면 유한책임회사의 신규 등록 수는 올해 8월까지 333곳으로, 작년 한 해 연간 수치(371곳)에 육박한다. 2017년 318곳이던 유한책임회사 신규 등록은 꾸준히 증가하다가 올해 급증하고 있다.

◇세금 회피 의혹 외국 기업도

외국 기업의 이런 비밀주의는 조세 회피를 노린 수단이란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한국에서 최대 5조원을 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금은 거의 안 내는 것으로 알려진 구글코리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소비자가 구글의 앱 장터인 구글플레이스토어에서 앱을 구매하면 30%의 수수료를 떼지만, 이 돈은 구글코리아가 아닌 싱가포르에 있는 구글아시아퍼시픽으로 가는 구조로 알려졌다. 한국 소비자는 앱을 구매할 때마다 싱가포르 법인에 돈을 내는 것이다.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로 보내,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