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등 이른바 ‘공정경제 3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강조하자, 재계에서는 “기업을 죽이는 규제 3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법안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키워드>을 담고 있는 상법개정안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을 뽑을 때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은 지분이 아무리 많더라도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정부·여당은 “중립적인 감사위원을 통해 대주주를 견제하는 공정경제를 실현하는 제도”라고 주장하지만, 재계에서는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하고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한국만의 과도한 규제”라고 반박하고 있다. 기업들은 “칼 아이칸 등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킨 외국 투기자본이나 ‘외국 스파이’에게 이사회 문을 활짝 열어주는 셈”이라고도 했다. 감사위원은 회사 영업에 관한 보고·조사권, 각종 서류·회계장부 요구권, 자회사에 대한 영업 보고 요구권 등을 갖고 있다. 회사 경영 기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주요 경영 사항을 결정하는 이사회 구성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외국 투기자본 등이 ‘다른 의도’를 품고 지분 매입에 나서 감사위원을 선출시키면 기업 경영에 결정적 타격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이다.
◇삼성전자 이사회에 외국 기관투자자 입장 대변 감사위원 진출 가능
28일 본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감사위원 분리 선출 시 외국 기관투자자 연합은 우리나라 시총 상위 30위 기업 중 최대 29곳 이사회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감사위원을 진출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가 총액 기준 30대 기업의 최대 주주, 특수관계인, 국민연금, 국내·외국 기관투자자(지분율 0.01% 이상) 지분율을 분석한 결과다.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이건희 회장과 삼성물산(5.01%), 삼성생명(8.51%) 등 최대 주주와 그 특수관계인의 지분이 21.2%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이 이뤄지면, 이들이 감사위원을 뽑을 때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쪼그라든다. 반면, 삼성전자의 외국 기관투자자인 블랙록, 뱅가드, 캐피털리서치앤드매니지먼트, 노르웨이 은행투자운영위원회 등 4곳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10%가 넘는다. 이들이 뜻을 합치면, 삼성전자 이사회에 원하는 감사위원을 손쉽게 선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외국 자본의 이사회 장악 발판 될 것"
전경련은 30대 기업의 감사위원 선출을 지분별 지지 분포에 따라 크게 여섯 가지 경우로 나눠 시뮬레이션을 했다. 국민연금과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모두 최대 주주를 지지하는 경우에도, 외국 기관투자자들은 힘을 합치면 기업 30곳 중 23곳 이사회에 자신들 입맛에 맞는 감사위원을 진출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SK하이닉스·LG화학·현대차·포스코 등 국내 대표 기업 이사회에 외국 투자자들이 원하는 감사위원을 꽂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가 아니라 외국 기관투자자 편에 서게 되면 감사위원을 진출시킬 수 있는 외국 기관투자자는 26사로 늘어났다. 외국 기관투자자가 여론전 등을 잘 펼쳐 개인 주주 4분의 1의 지지를 받으면 시총 30위 기업 중 넷마블을 제외한 29곳 이사회에 본인들이 원하는 감사위원을 선출할 수 있다. 넷마블은 외국 기관투자자의 총지분이 4.3%에 불과해 지분 쪼개기 등 합종연횡을 하더라도 감사위원 선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반면, 외국 기관투자자 지분이 30%가 넘고, 최대 주주가 국민연금(12.84%)인 네이버는 이 같은 공격에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소수 주주 권한 강화를 명분으로 한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는 당초 정부 기대와 달리 외국 투기 자본이 우리 기업의 이사회를 장악해 먹튀 논란 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핵심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기회를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1인 이상)를 이사 선출 단계부터 다른 이사들과 분리 선출토록 하는 제도. 특히, 감사위원 선출 때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이 아무리 많아도 의결권은 합산해 3% 이내로 제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