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신경영’을 설명하고 있다./삼성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회장의 예전 명언들과 경영활동을 모은 영상. /삼성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로 삼성 사장들과 임직원을 불러 모아 회의를 주재하던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도 삼성 60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히는 장면이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삼성 제2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앞서 세탁기의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사내방송을 보고 격노했었고, 바로 전날엔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한편의 보고서를 읽었다. 자신이 3년 전 일본 교세라에서 스카우트해 온 후쿠다 타미오 고문이 쓴 여기엔 후쿠다 고문이 제안한 의견들이 삼성조직에 안 먹히는 현실과 왜 안 먹히는지에 대한 분석이 가득했다. ‘신경영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후쿠다 보고서’였다. 당시 이 회장은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9차 IOC 총회가 4일 오전 (한국시간) 과테말라시티 국립극장에서 개막됐다.사마란치 IOC 명예위원장이 이건희 IOC위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이었다. 독창적인 발상으로 오너가 아니면 내릴 수 없는 결단으로 오늘의 삼성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 역사에서 최초로 명품의 반열에 오른 애니콜 신화에도 이건희의 결단의 순간이 함께 한다.

1995년 무선전화기 화형식 장면. / 조선일보DB

1995년 3월 9일 오전 10시.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엔 2000여명의 전직원이 모인 가운데 애니콜과 무선전화기, 카폰, 팩시밀리 등 15만대가 쌓여 있었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란 현수막 아래로 ‘품질확보’란 머리띠를 두른 직원 10여명이 해머로 제품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어 이 제품을 불구덩이에 던져 태웠다. 앞서 설 선물로 삼성 임원들에게 2000여대의 휴대폰을 돌렸는데, “통화가 안된다”는 불만이 나왔고 이를 이건희 회장이 전해 들은 것이다. 이 회장은 '돈받고 불량품을 만들다니, 고객이 두렵지도 않나"면서 화형식을 지시한 것이다. 당시 불태운 15만대는 시가로 500억원어치에 이르렀다. 하지만 7년 뒤인 2002년 삼성전자는 휴대폰 4500만대를 팔아 3조원의 수익을 올렸다. 삼성 관계자는 “1995년 당시 회사 전체 이익의 5%를 한순간에 불태운 과감성이 결국 직원들의 투지에 불을 지폈고, 애니콜 신화로까지 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2010년 5월 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권오현 사장, 이건희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 정칠희 부사장(반도체연구소장), 전영현 부사장(D램 개발실장(왼쪽부터)이 기공식을 갖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photo@newsis.com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중심에도 이건희의 결단은 있었다. 우선 1987년 당시 삼성전자는 4메가 D램 개발 방식을 스택(쌓는 방식)으로 할 것이냐, 트렌치(파들어가는 방식)로 할 것이냐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건희는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원칙으로 난국을 타개했다. 일단 두 기술을 단순화시켜 보았다. 그랬더니 쌓아 올리는 것이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쉽고, 문제가 생겼을 때 회로를 고치는 것이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조원의 투자금이 들어가고 회사가 끝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플래시 메모리도 마찬가지였다. 플래시메모리반도체의 경우 2001년 일본 도시바로부터 공동 투자 제의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도시바가 한 발짝 더 발전해 있었다. 투자비용만도 2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당시 이건희 회장은 플래시메모리 반도체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독자 투자를 결정했다. 그 결과 2004년 삼성은 플래시메모리 점유율 60%를 기록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대전 유성구 국립중앙과학관애서 열린 '근·현대과학기술관' 개관식에서 한 참석자가 우리나라 최초 휴대전화인 '삼성 SH-100'가 전시되고 있다./연합뉴스

엔지니어 감각을 지닌 이 회장은 각종 제품 개발에서도 직접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1983년 모토로라가 ‘다이나택’을 효시로 휴대폰 시장을 열어가자 세계 각국 전자기업들은 모토로라를 뒤쫓기 시작했다. 삼성도 1987년 휴대폰 생산에 뛰어들었고, 1989년에 ‘SH-100’을 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휴대폰 시대를 열어갔다. 모토로라가 처음 휴대폰을 내놓은 이후 그때까지 휴대폰의 통화(SEND), 종료(END) 버튼은 일괄적으로 숫자 키 아래에 있었다. 삼성에서 처음 개발한 휴대폰 역시 이런 관행을 따랐다.

제품을 살펴보던 이 회장이 삼성전자 경영진에게 이와 같이 얘기했다.

“가장 많이 쓰는 키가 SEND와 END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거나 끊기가 불편하다. 두 키를 제일 위쪽으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많이 사용하는 만큼 눈에 잘 띄어야 한다. 키 글자 색깔도 숫자 키와는 다른 색깔을 넣는 것이 좋겠다.”

모두가 모토로라의 다이나택이 만들어놓은 관행을 따라가기 급급하던 당시에 이러한 지시는 파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SEND, END 키가 위로 올라간 삼성 휴대폰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로 모든 휴대폰에서 SEND, END 키는 위로 옮겨졌다. 1000만대 이상 팔리면서 대히트를 쳤던 ‘이건희폰’ 등 그의 엔지니어적인 감각은 삼성 제품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외에도 ‘숨어있던 1인치를 찾아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원 TV’도 이 회장의 지시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1996년 당시 TV의 표준화면 규격은 4:3이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화면 규격은 이보다 가로가 조금 더 긴 12.8:9였다. 이건희 회장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이 점을 지적했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영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규격의 TV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그 결과 숨겨진 1인치가 더 늘어난 ‘명품 플러스원 TV’가 등장하면서 삼성전자 TV는 새롭게 주목 받게 됐다.